시즌 1

도시농부의 꽃

지난겨울은 유난히 혹독하고 매섭게 차가웠던 것 같다. 그 겨울 추위가 얼마나 맹렬했던지 발코니에서 십 년 넘게 무탈하게 키우던 화분이 얼어버렸다. 추위에 대비하여 집안에 들여놓지 못한 스스로 게으름 탓이지만, 오랜 시간을 가꾸어 온 것이라 조금은 마음이 허전하다. 

오래전 일이지만, 한동안 길을 찾지 못하던 날이 있었다. 수많은 기회와 선택 앞에서 선뜻 가야 할 길을 선택하지 못한 나는, 쉬운 길에서 그만 미아가 되어 서 있었다. 평범한 일상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일인데도 행복하다는 마음이 들지 않는 날들이 이어졌다. 이런 마음이 전해졌던 것일까, 지금은 소천하신 부친이 어느 날 전화를 주셔서는 생명을 가꾸고 키운다는 책임감에서 얻는 보람을 느껴보라며 화분 하나 키워보라 하셨다.

본래 성품이 게으른 내가 무언가를 키우고 가꾸는 일은 잘 못 한다는 것을 세상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 그런 이야기를 했을 때 의아했다. 그렇지만, 말씀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을 수요 장터에서 마음에 드는 화분 하나를 발견하고는 그때부터 키우기 시작한 것이 햇수로 십 년이 되었다. 아직도 그 화분의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데,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늘 한결같은 모습에 애정도 조금씩 자라났다. 부친이 소천하신 뒤에는 어쩌면 나에게 남겨진 당신의 말씀 같은 화분이라 조금 더 애지중지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소중한 추억이 마디마디 걸려 있는 화분이었는데, 안이한 게으름으로 이 겨울 그렇게 인연이 다하게 된 것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스스로 게으름에 대한 원망이 상념처럼 피어오르던 중에, 이상하게도 지난해 가을 텃밭에서 마주쳤던 한 송이 꽃이 문득 떠오른다. 일상적으로 좀처럼 보기 힘든, 무리 지은 꽃송이가 인상 깊기도 했지만, 텃밭에서 만나리라 기대하지 않고 마주한 꽃이라 그랬는지 그렇게 예뻐 보였다. 오가는 이웃에게 꽃 이름을 물어보고서야 그 꽃이 부추 꽃임을 알았다. 갑자기 이 꽃이 왜 떠올랐을까? 

부추는 꽃이 피면 대가 억세져서 먹기가 어렵다. 꽃을 이용한 요리법도 있지만, 이제 처음 농사를 배우기 시작한 도시농부에게 부추 꽃 요리는 아직은 대하기 쉽지 않은 생소한 요리이다. 농부의 원래 목표는 야들야들한 부추였는데, 일상생활과 도시농부, 두 가지 삶을 병행하다 보니 수확의 시기를 놓친 것이 아니었나 싶다. 바쁜 일상을 헤치며 살아가는 도시농부의 바쁨과 나의 게으름을 같은 것으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애써 도시농부가 수확의 시기를 잠시 잊은 것에, 나의 아픈 실수를 섞어서 비슷한 것으로 만들어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려 이 꽃이 문득 떠오른 모양이다.

어떤 일은 생각처럼 이루어지지 않는다. 처음 도시농업을 꿈꾸며 텃밭을 조성하려고 했던 3년의 세월 동안 뜻한 바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서 포기하려 했던 시간 속에서 나는 인생의 씁쓸한 맛을 보았다. 그전까지는 그렇게까지 소망을 담아서 무엇인가를 시도해본 일이 없던 나였기에, 바로 눈앞에 보일 듯하면서도 좀처럼 잡히지 않는 현실과 희망 사이의 간격에서 조금은 좌절감을 맛보았던 것도 사실이다. 당장 생활에 도움이 되는 일도 아니었기에, 그냥 포기했으면 좋았을 일이지만, 긴 시간 동안 함께 애써온 이웃들에게 나와 같은 좌절감을 안겨주고 끝내고 싶지 않았다. 그 희망과 바람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묻어 두고는 한 걸음도 더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렇게 뜻한 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는 날에 나는 발코니에 놓인 화분 앞에 서서 잎사귀 하나하나를 닦으며 물을 주고 군데군데 싹 나 있는 토끼풀을 뽑으며 마음을 차분하게 비우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그때 조금은 부친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화분 하나 정성스럽게 가꾸어 보라는 그 말씀에 담긴 의미와 애정을. 그 마음에 담긴 진심에 닿았을 때, 나는 무거운 짐을 포기하지 않고 잠시 내려놓는 법을 배웠다. 길 위에서 쉬어가는 법도 있음을 알게 된 것이었다. 조급함을 내려놓자 함께 하는 사람들이 더 가까이 보였고, 동행에 의지하면서 길을 천천히 찾아가는 여유 속에서 이전보다는 편안하게 한 걸음씩 내디딜 수 있었다. 혜윰뜰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게으름에 관해 이야기를 꺼냈으니 지난해 경작 이야기를 안 하고 지나갈 수 없겠다. 늦은 봄날 아주 여유로운 마음으로 텃밭에 올랐다. 6월 중순 즈음으로 생각되는데, 경작하던 곳에 알 수 없는 꽃이 말 그대로 바람결을 따라 반짝이며 피어 있었다. 나는 속마음으로 ‘그동안 밭일을 하지 않았더니 어느 이웃분이 안타까운 마음에 꽃을 다 심어 놓으셨구나, 참 보기 좋다!’라는 생각을 했다. 마침 옆에서 한창 토마토 수확을 하던 혜윰뜰 도시농업공동체 회원분에게 이 꽃이 어느 분의 솜씨인지를 물으니, 그분이 나의 등을 딱 때리시면서 하는 말씀이 ‘대표님이 심은 거잖아요. 쑥갓입니다, 쑥갓!’이라는 것이다. 하도 수확을 하지 않으니까 쑥갓이 자랄 대로 자라서 꽃까지 피운 것이었다. 

“쑥갓 오래 키웠지만, 꽃은 정말 처음 보내요”

회원분들이 지나가면서 꽃 피운 쑥갓을 보고는 한 말씀씩 하신다. 지나치도록 여유 넘치는 도시농부의 게으름으로 쑥갓꽃을 만나게 되었으니 게으름이라는 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닌가 보다. 이왕에 피운 꽃, 활용할 방법이 있을까 알아보니, 쑥갓꽃은 예로부터 불면증 해소에 도움이 되는 훌륭한 꽃차이다. 꽃을 잘 따서 꽃대를 바짝 잘라주고 며칠을 잘 말린 다음, 적당히 달군 팬에 몇 번 가볍게 구워주면 시중에서 파는 국화차와 같은 꽃차다운 형태가 된다. 그대로 잘 말려두었다가 마음 무거워 잠 안 오는 날 따뜻한 물에 내린 쑥갓 꽃차 한잔이면 훌륭한 불면증 치료제가 된다고 하니 불면증이 있는 분이라면 올봄에 쑥갓 씨앗으로 작은 쑥갓 꽃밭을 만들어 보는 것도 괜찮아 보인다.

문득 그 말씀이 다시 떠오른다. 마음에 드는 식물 하나 정해서 정성껏 키워보라는 말씀에 담긴 의미가 날이 갈수록 새롭다. 오랫동안 가꾸어온 화분을 지난겨울에 잃고 스스로의 부족함을 자책하는 마음만 들었는데, 쑥갓꽃을 떠올려보니 게으름도 어쩌면 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한 가지 방법이지 않은가 싶다. 올해는 다시 처음 시작하는 마음으로 빈 화분을 채워 보려 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좀 더 슬기롭게 게을러져 볼 생각이다. 올해는 조금 더 아름다운 도시농부의 꽃을 피울 수 있기를 희망하며, 당신의 말씀이 꽃 피는 계절마다 다시 소생하기를 바라면서. 🍀

바람은 소망하는 곳으로 분다

가을 수확이 끝나고 겨울바람이 찾아드는 텃밭에는 어딘지 모를 쓸쓸함이 묻어 있다. 매년 비슷한 풍경이지만, 올해 기분이 남다른 이유는 지난해 치열했던 시간이 아직도 고스란히 마음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뜻한 대로, 기대한 대로 살아내지 못한 2020년이 사무치도록 아직 내 안에서 떠나가지 못하고 있다. 미래에 돌이켜 생각해볼 때 2020년만큼 이상한 날이 또 있을지 의문이다.

혜윰뜰 도시농업공동체는 도시농업 활동 이외에도 마을공동체 활동을 기획 운영하고 있다. 2019년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활동은 이웃과 만나는 재미에 힘든 줄 모르고 했다. 마을 탐방을 함께 하고, 생태도시농업 건강마을만들기 교육에서는 도시농업과 치유 원예에 대한 진지한 수업이 이어지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이웃과 이웃의 만남이 이어졌다.

마을공동체 활동에서 만난 이웃들과 마을 일을 함께 이야기 나누는 과정에서 혜윰뜰 도시농업공동체도 태어났다고 할 수 있으니, 어찌 보면 일련의 마을공동체 활동이 혜윰뜰에는 부모와 같은 역할이기도 하다. 마을 길을 함께 걷고 같은 공간에서 붓글씨를 쓰는 수업과 같은 활동이 공동체 탄생으로 이어진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사람과 사람의 만남 사이에는 형언하기 어려운 강한 힘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만남을 통해서 새로운 공동체가 탄생했던 2019년에 비해서 2020년은 마을공동체를 지켜내는 일마저도 힘겨운 날들이었다. 얼굴 마주 보는 활동이 안 되다 보니 텃밭에서조차 마스크 쓰고 조심스럽게 텃밭 경작 활동을 했던 것이 2020년의 현실이었다. 

2020년 봄이 지나도 일상이 회복될 희망이 안 보이자 혜윰뜰에서는 계획한 마을공동체 활동을 모두 취소하려고 했던 순간이 있었다. 어떤 형태가 되었건 마을공동체 활동을 이대로 이어가면, 어렵고 힘든 순간들이 있을 것이라는 직감 같은 생각이 스쳐 갔기 때문인데, 텃밭에서 만난 이웃분의 말 한마디에 포기하려던 생각을 내려놓고 방법을 찾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만남의 형태가 꼭 얼굴을 직접 마주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웃의 말속에는 마을공동체 활동이 어렵더라도 멈추지 않았으면 하는 희망이 섞여 있었다. 이웃의 바람을 흘려보내기 어려워 고민하며 방법을 찾아보다 선택한 것이 비대면으로 하는 마을공동체 활동이었다.

바람은 소망하는 곳으로 분다고 했던가. 소망하는 마음에 호응하듯 마을공동체 활동도 이전과 형태는 다르지만, 함께 하는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었다. 캘리그라피 수업과 행복원예 프로그램을 온라인으로 진행했는데, 호응이 좋았다. 어려운 시기에 포기하지 않고 화면 너머이기는 하지만, 익숙한 얼굴의 이웃과 함께 하는 시간이 참여하는 이웃에게는 회복의 시간이 되어 주었다. 원래의 계획과는 형식도 과정도 결과도 달랐지만, 소망했던 것 하나는 변함없이 이룰 수 있었다. 이웃과 함께 마을에서 행복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겠다는 소망은 포근한 미풍이 되어 2020년에 상처받은 마음을 조금은 안아줄 수 있었다. 

2021년에는 일상의 평온함을 조금은 되찾을 수 있을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부디 그렇게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함께 소망하고 바라보다 보면 분명히 소망하는 방향으로 바람이 불어줄 것이라고 믿어 보려 한다. 글 쓰는 날 마침 겨울 다운 눈이 내려 텃밭을 찾아갔다. 혜윰뜰 텃밭에 휴식의 공간이 되어 주던 나무벤치에 누군가의 손도장이 조금 장난스러운 느낌으로 찍혀 있었다. 나는 계단에 쌓인 눈 치울 생각만 하고 올라왔는데 누군가는 여유 넘치는 마음으로 손바닥 도장을 찍어 놓은 것을 보니 혼자 웃음이 나왔다. ‘그래, 여유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에 내 마음에도 여유가 찾아왔다. 가끔은 쌓은 그대로 두어도 좋다는 생각에 눈 쌓인 혜윰뜰을 뽀드득뽀드득 눈 밟은 소리를 들으며 거닐다 내려왔다. 

올해는 더 천천히 여유 있게 걸어보려 한다. 도시농부의 삶 속에 여유와 행복을 채우기 위해서, 동행하는 이웃들과 더 멀리 가보기 위해서 말이다. 도시농부로서 한 가지 배운 것이 있다면 이것이다. 조금 늦게 가도 된다는 것, 천천히 심어도 괜찮다는 것 말이다. 천천히 심고 조금 덜 수확해도 괜찮다. 다음 기회는 우리 앞에 언제나 놓여 있으니. 지금은 그런 믿음으로 호흡을 가다듬을 때인가 보다. 바람이 소망하는 곳으로 불어오기를 기다리면서. 🍀

공연이 끝난 뒤

콘서트가 열렸다. 혜윰뜰 텃밭에서. 올봄에 콘서트 이야기할 때만 해도 농담이나 희망 사항 같은 이야기라 생각했는데 그 일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지난 4월에 콘서트 이야기가 처음 나왔을 때, 그런 일을 일어날 리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텃밭에서 콘서트라니, 게다가 이 시국에.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했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할 수 있다면 재미있겠다 느낀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봄, 여름이 지나고 혜윰뜰 텃밭에서의 콘서트는 모두의 마음에서 잊혀진 듯했지만, 오판이었다. 가을이 오고 사회적거리 두기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정착되자, 해볼 수 있다는 생각들이 커져갔다. 그렇게 콘서트의 준비는 시작되었다. 마침 좋았던 것은 평소 마을에서 많이 의지하는 활동가분의 소개로 같은 마을주민인 공연기획 PD님과 만남이 성사되었다는 것이다. 출연진 구하지 못하면 마이크에 스피커 하나 두고 나라도 나가서 노래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콘서트의 그림이 한순간에 작은 방송 수준 공연으로 피어났다.

공연기획 PD님과의 첫 만남은 파격의 연속이었다. 처음 만남 자리에서 출연진 이야기부터 꺼냈다. 어느 정도 섭외가 가능하겠냐는 나의 물음에 ‘어느 정도까지 필요하신 데요’라는 자신감과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담긴 답변이 돌아왔다. 그렇게 처음 논의 자리에서 정해진 출연진이 50·60세대의 유명가수, 테너 류정필 님, 그리고 사회는 KBS 유명 프로그램의 성우인 송연희 님으로 정해졌다. 한 시간 정도의 회의가 끝나고 내려오면서 든 솔직한 마음은 이랬다.

‘아니, 동네 텃밭 무대 배추 앞에서 50·60세대의 유명가수와 테너 류정필 님이 공연한다고? KBS 성우님이 사회를 보고, 공연기획 PD님은 보상도 없이 재능기부로 공연을 준비하신다고?’

비현실적인,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첫 회의 논의가 너무 순조로운 탓이었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난관이 찾아왔다. 코로나19라는 위기 상황에 콘서트를 한다는 것에 대한 회의감이 일어났다. 그래서 방역 기초부터 다시 논의하였다. 때마침 서울시 도시농업과에서 있었던 도시농업 네트워크 데이라는 행사 2부 토크쇼에 패널로 초대받았던 경험이 도움이 되었다. 서울시 행사의 방역에 관한 조치들을 보며, 같은 수준의 방역으로 행사를 준비하면 되겠다는 자신감을 찾은 것이다.

그와 함께 주변의 도움이 이어졌다. 공동주택의 입주자대표회의는 텃밭 이용에 대한 조건 없는 기회를 제공해주었고, 혜윰뜰 공동체 회원들은 각자 스텝을 자처하며 공연 참여의 뜻을 밝혔다. 언젠가는 평범한 일상을 회복하리라는 희망으로 시작된 텃밭 콘서트의 의지가 꺾여 스러지는 것을 막고 싶은 마음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어느 순간부터 텃밭 콘서트는 내일에 대한 작은 희망의 전환점처럼 자리를 잡아갔다. 공연의 날이 그렇게 하루하루 찾아왔다.

혜윰뜰 회원 중 스텝을 정하여 누군가는 출연진 응대를 담당하고, 또 누군가는 공연장 꾸밈을 맡았다. 나는 여러 업무 중에서 출연진의 식사와 커피를 담당했다. 모두 마음의 준비는 했지만, 막상 공연 당일이 되자 손볼 일이 한둘이 아니다. 식사는 제때 준비가 될지, 커피는 어떻게 하면 찬바람에 따뜻한 커피를 제공해야 하는지, 공연장이 될 혜윰뜰 텃밭 입구를 꾸미는 작업은 언제까지 마무리가 되어야 할지, 시시각각 다가오는 작은 과제들이 쌓이고 해결하기를 반복하다 보니 공연의 시간이 다가왔다.

사회적거리두기를 실천하는 온택트 공연이 되다 보니 종로 TV에서 실황중계까지 하게 되었다. 혜윰뜰 텃밭의 가을 농사 결실이 방송까지 나가는 상황이라, 배추 잎 하나하나에도 마음이 쓰인다. 거리두기를 위해서 객석을 넓게 배치했다. 누군가는 배추 위에 의자를 놓고 앉아야 하는 상황도 연출이 되었다. 

황금빛 햇살이 공연장에 쏟아진다. 마치 공연 시작을 알리는 조명처럼 부드러운 빛의 물결이 텃밭 작물 사이사이를 채우기 시작한다. 저 멀리 보이는 천막에서는 총감독과 음향팀이 리허설에 맞춰 장비를 조정하고 있다.

공연은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아니 어쩌면 어딘가 부족한 것이 있었거나 문제가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공연이 시작된 순간부터 나는 스텝이라거나, 관계자가 아닌 관객으로 몰입해서 알 수 없었다. 공연을 시작하는 열정적 탱고 무대에 빠져든 순간부터 온전히 관객으로 공연을 즐길 수 있었다. 

흔히 하는 표현으로 마법 같은 순간이 나에게도 찾아온 것이다. 무언가에 완전히 몰입하여 나 자신조차도 다른 사람이 되어 보는 경험은 새롭고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무대가 사람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았다. 테너 류정필 님의 때로는 강렬하거나 애절함이, 여전히 소년 같은 감미로운 50·60세대의 유명가수의 부드러움이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공연은 그렇게 끝이 났다. 재능기부를 해 주신 PD님, 구청 관계자, 스텝 모두의 눈빛에 안도의 기운이 감돌았다. 날이 너무 추워지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구름과 햇살이 시시각각 교차하면서 만들어내는 텃밭의 음영과 황금빛이 무대를 더욱 빛나게 만들어 주었다. 공연 현장에서 함께 한 이웃분들의 인심 좋은 덕담 같은 격려의 말씀에 그제야 긴장한 마음이 평상심을 찾아가는 것을 느꼈다. 

스스로 만족스러운 행사였고, 각자 해야 할 몫의 일을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면서도, 형언하기 힘든 공허함이 문득 피부를 파고 스며든다. 시간을 재촉하는 스산한 겨울비가 마침 내린 탓일까,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은 그 날이 벌써 그리운 이유 때문일까. 🍀

도농상생 장터

혜윰뜰에 오랜만에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지역상생교류사업단이라는 연결 고리를 통해서 남원 농부들과 상생을 위한 교류가 시작된 것이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혜윰뜰 도시농부들이 남원을 먼저 탐방 가서 농사에 대한 현지 지식도 배우고, 그곳 자연 환경도 체험하는 시간이 앞서서 있을 예정이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오랫동안 교류 없이 시간만 흘러가 버렸다. 올해는 아무것도 못하고 이대로 시간이 지나가버리겠구나 생각하던 중에 서로 교류회는 하지 못하더라도, 지역 농부의 좋은 상품을 소개할 자리는 마련해보자는 취지에서 가을공감 도농상생 장터라는 이름의 직거래 장터가 열린 것이다.

행사를 준비하면서 포스터 등은 직접 만드는데, 포스터 만드는 동안에 ‘일상적인 행사와 같은 직거래 장터’ 한번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나의 이런 가벼운 생각은 직거래 장터 전날 올라온 농부들과 만나는 순간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직거래 장터를 위한 상품 준비를 하느라 그 어느 때보다 이른 하루를 시작하고 먼 길을 와서 피곤할 법도 한데, 남원 농부들은 혜윰뜰이 자리하고 있는 마을부터 보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마을 탐방이 시작되었다. 마을 주변을 둘러보고, 텃밭 옆에 새롭게 오픈한 종로구 도시농업지원센터도 진지하게 답사하는 농부들을 보며 상생이라는 말의 의미를 나 스스로 너무 가볍게 생각했구나 하는 반성의 시간이 찾아왔다. 생각해보면 2020년은 우리 모두에게 유독 혹독한 날들이 이어졌다. 거기에 더해서 각 지역의 농부에게는 너무도 긴 장마와 갑작스러운 홍수 피해로 두 배, 세 배의 고행이 이어졌다는 것을 남원 농부를 만나서 이야기 나누고나서 현실적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잠시나마 가벼운 친목 모임 정도로 상생장터를 생각했던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재배하고 생산한 농부가 직접 판매한다는 신뢰 덕분일까? 첫날의 직거래 장터는 예상을 넘어서 꽤나 성공적이었다. 매진이라고 부를 만한 성과였는데, 매진사례는 좀처럼 없는 일이라고 한다. 도농상생 장터를 가벼이 여겼던 어제의 마음이 부끄러워서 홍보라도 열심히 해보자고 뛰어다녔는데 그 덕도 조금은 있는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사상 처음 있는 (표현이 다소 과장되었을 수도 있지만) 성과에 서로가 고무되어, 한번만 하기로 계획했던 장터를 한번 더 여는 것으로 의기투합했다.

첫번째 직거래 장터 일주일 뒤 또 한번의 장이 열렸다. 이번에는 참여 농가도 배로 늘었다. 그런데 마침 날이 많이 흐리다. 일주일전 훈훈한 바람과는 다른 싸늘한 기운이 장터의 주변을 맴돌고, 갑자기 내린 추위로 썰렁한 장터를 바라보는 내 마음도 덜컥 내려 앉는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남원에서 서울 종로 무악동까지 한걸음에 와준 농부의 기대와 희망이 상처받고 돌아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안타까움에 마음이 조여왔다. 내 마음이 표정에 드러난 것일까? 농부 한 분이 말씀하신다.

“직거래 장터를 다니다 보면 이보다 더 어려운 일도 많이 있습니다. 흐린 날도 비 맞는 날도 있지만, 다시 맑은 날도 있을 것을 알기에 괜찮습니다.”
 
역시 수십년 농부의 내공은 다름을 느꼈다. 한편으로는 조금 안심하면서도 그래도 어떻게 마련한 장터인데… 기회를 이대로 버릴 수 없다는 오기에 가까운 의지가 타올랐다. 이쯤에서 이번 장터가 열리기까지 있었던 작은 에피소드 한가지를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혜윰뜰이 있는 공동주택에는 원래 수요일마다 장이 선다. 도농상생 직거래 장터는 이 수요장터에 함께 참여를 한 것인데, 원래 장사하던 분들이 자신들의 자리를 허락하여 장사를 함께 한다는 것이 쉬운 선택은 아니었을 것이다.

상인들의 어려운 사정을 알기에 직거래 장터를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상의를 나눈 곳이 기존 상인이었다. 나는 이분들이 어려워하면 직거래 장터는 포기할 생각을 했는데, 선뜻 동의해주는 모습에 사실 놀랐다. 판매할 품목을 공유하고, 약간의 조정을 한 뒤 직거래 장터 오픈을 위해 협력이 필요한 입주자대표회의, 관리사무소와 협의를 이어 나갔다. 소중한 협력으로 마련한 기회가 무산되어서는 상생이라는 이름으로 애써 힘을 더해준 이들에게 고개를 들 수 없는 노릇이기에 이 날은 하루 종일 홍보팀을 자처하고 다녔던 기억이다. 물건 구입을 많이 하면 직전 입주자대표회장이 직접 배달도 해드린다는 홍보성 멘트도 아끼지 않았다.

서로에 대한 배려가 가져온 작은 성과

마을 밴드와 게시판, 방송과 SNS로 홍보를 이어 나가자 찬바람 일던 장터에도 가끔씩 이웃의 발걸음이 찾아 들기 시작한다. 어느 세대인지 모르겠지만 청국장을 사서 바로 요리를 해서 드시고는 ‘짜지 않고 감칠맛이 일품인 청국장이 장터에 있다’는 소식을 올리자, 청국장이 금방 동났다. 직접 맛보고 이어지는 품평이 메신저 등을 통해서 퍼지면서 이 날 직거래 장터도 작은 목표는 달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제서야 2일차 장사꾼의 마음에도 작은 여유가 찾아 든다.

직거래 장터는 어찌 보면 남의 일이다. 장터가 흥해서 수익이 많다고 해도 개인적으로 얻을 이익이 없고, 잘못된다고 책임을 물을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명히 남의 일이어야 할 직거래 장터가 나의 일처럼 여겨졌다. 이유가 궁금하여 스스로 조용히 마음을 되짚어 보니 답이 금방 떠오른다. 첫번째 장이 서던 날 남원 농부들이 보여준 혜윰뜰 마을에 대한 관심과 진지한 참여에서, 이 분들이 단순히 장사하러 멀리 남원에서 서울까지 올라온 것이 아니라는 진심을 분명히 느꼈던 것이다. 타지에서 올라온 분들이 먼저 이웃이 되고자 손을 내밀었으니 그에 화답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두번째 직거래 장터에서는 230여건의 판매가 이루어졌다. 장터 오래하신 분의 말씀을 빌려보면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니라고 한다. 장터가 마무리되고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갈 남원 농부를 생각하니 하루 동안 조여 놓았던 나의 마음도 한없이 풀어진다.

이 날 입소문을 타고 판매된 청국장을 나도 하나 구입했다. 청국장에 묵은 김치 송송 썰어 넣고, 같은 날 구입한 표고버섯을 조금 더하니 그 맛이 일품이다. 은은한 운치가 감도는 옻칠 물잔에 국화차 한잔을 곁들이니 식탁에 정갈한 만족감이 차오른다. 남원의 일상으로 돌아간 농부님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소식이 궁금하다. 장이 서던 날 새벽부터 가족과 함께 서울 나들이를 했던 지리산 맑은이도 잘 지내고 있을까? 어찌된 일인지 두번의 만남이었을 뿐인데 어느새 농부의 이웃이 된 마음이다. 🍀

친환경 자연 농법에 관한 단상

가을 햇살이 예사롭지 않다. 무심하게 던져 놓은 목장갑도 가을 빛 안에서 그림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니 말이다. 혜윰뜰 텃밭의 풍경은 이렇게 평화로운데 실상 그 안에서는 매일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가을 농사의 훼방꾼 병충해가 혜윰뜰 텃밭에도 어김없이 찾아온 것이다.

도시농업을 설명할 때 흔히 하는 표현 중에 자연과 함께 하는, 자연을 벗삼은 도심 속 마음 치유 활동이라는 수식어가 있다. 처음 도시농업을 시작할 때 자연과 함께 라는 표현을 보고 큰 기대감을 가진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제 2년차 도시농부 활동을 하다 보니, 농사라는 것은 자연을 벗 삼은 자연스러운 활동이 전혀 아님을 알게 된다. 

농부가 자연을 벗삼아 농업을 하려면 수확은 포기하고, 땅과 곤충에게 대부분의 작물을 헌납해야 가능한 말이기 때문이다. 실상 도시농부의 텃밭 활동은 자연과의 전쟁, 경합의 연속이다. 그리고 이 전쟁은 대체로 자연의 승리로 마무리되곤 한다. 도시농부는 수확이라는 작은 목표를 향하고 있지만, 자연은 생존이라는 중대한 이유를 걸고 대항하기 때문이다.
 
혜윰뜰은 특히나 자연과의 생존 경쟁이 치열하다. 혜윰뜰 텃밭의 원경을 보면 이곳은 도시라고 부를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조금 떨어져서 보면 혜윰뜰 텃밭은 산의 일부를 빌려 쓰고 있는 형국이다. 산은 호락호락하게 모든 것을 쉽게 주지 않는다. 아무리 열심히 벌레를 잡고, 좋은 비료를 주어도, 하루 이틀 쏟아져 내리는 비가 지나고 나면 양분은 흘러가 버리고, 벌레는 다시 제 집처럼 텃밭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여름 동안 그렇게 고생스럽게 가꾼 작물이 시들기 시작하면 도시농부의 마음에도 오기가 생긴다. 자연과의 생존을 건 이 경합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된다.

올 해는 그래서 친환경 자연 농법이라 명명된 방법을 적용해 보고 있다. 농부 아닌 분에게 큰 관심 없는 분야이겠지만, 몇 가지 간략히 소개해보면 이렇다. 우선은 자연 선충을 이용한 해충 방제가 있다. 사람과 작물에게는 무해한 선충을 물에 풀어서 밭에 충분히 스며들게 주면 선충이 땅 속의 애벌레를 찾아가서 성장을 방해한다. 결국 애벌레는 더 성장하지 못하고 땅 속에서 자연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땅 속의 벌레는 해결을 보았지만, 다 자라서 작물을 가해하는 성충에는 또 다른 전략이 필요하다. 이럴 때 사용해볼 수 있는 것이 님나무에서 얻은 님오일이나, 콩과 식물 뿌리에서 추출한 로테논과 같은 방제용품이다. 조금 부지런히 설명서대로 작업을 하면, 생각보다 벌레가 줄어드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도시농부의 텃밭에는 충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병해도 있기 마련인데 배추에는 주로 무사마귀병이 쉽게 온다. 이 병은 토양전염성 병균으로 배추 등의 뿌리를 가해해서 작물을 시들게 한다. 예전에는 병이 오면 아예 출하하지 못하였지만, 최근에는 방제를 통해서 이겨내는 농가도 있다고 한다. 혜윰뜰에도 이 병이 와서 유황을 주원료로 한 제품을 사용해보고 있다.

앞서 언급한 각종 제품에는 꼭 붙어 있는 수식어가 있다. 친환경 유기농 제품이라는 표현이다. 문득 이 말을 천천히 곱씹어 본다. 친환경이라면 자연을 생각한다는 말이 아닌가? 그런데 실상을 보면 이들 제품은 자연 속에서 생존하는 곤충을 잡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작물 가해 해충이라는 28점 무당벌레도 텃밭에서는 해충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지만, 산속으로 돌아가면 예쁜 점박이 무당벌레일 뿐이다. 생존을 위해 먹을 것을 찾아왔을 뿐인데, 도시농부는 해충이라 부르면서 친환경 약품이라는 이름으로 이들을 퇴치한다.

이렇게 보면 친환경이라는 말은 결국 사람에게 해가 없으니 안심하라는 암묵적 약속 같은 표현이다. 곤충 입장에서는 반칙 같은 행위일지 모르지만 어쩌겠는가? 처음 이야기 한 것처럼 도시농업은 생존을 건 자연과의 끊임없는 경합인 것을. 그렇지만 고민해볼 일이다. 친환경이라는 말의 의미에 오직 인간만을 담게 되면, 결국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생존의 터전을 잃을 수도 있을 것이기에. 🍀

우리의 오늘은 음악처럼 아름답다

2020년 8월 20일은 특별하게 기억에 남는 하루가 될 것 같다. 도시 농부의 가장 큰 도전과제라 할 수 있는 가을 농사를 위한 배추 모종을 맞이하는 날이기도 하지만, 날씨의 변화무쌍함이 특별한 하루이기 때문이다.

새벽 하늘에서 작은 이슬 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아침이 오면 모종을 들고 나를 시간인데 더운 날보다는 나으리라는 감사한 마음으로 우비를 챙긴다. 그렇게 맞이한 배추 모종이 아침 햇살에 정말 예쁘게 반짝인다.

가을 농사를 준비하는 날은 마음이 분주하다. 봄부터 여름 시간 동안 텃밭을 지켜온 작물과 작별 인사를 나누면서 새로운 가족을 맞이하는 준비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도착한 배추 모종을 정리하고 나니 어느새 혜윰뜰 텃밭에 찾아온 이웃들이 각자 텃밭 정리를 하고 있다. 

혜윰뜰 텃밭의 한가지 특징이라면 농사에 있어서 정해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참여하는 공동체 회원 각자가 스스로 배우고 터득한 방법으로 농사에 도전한다. 이것이 혜윰뜰 도시농업공동체가 가진 도시농업에 참여하는 방법이다. 자율속에서 배운 방법이 경험과 성과를 바탕으로 공동체에 전해지면서 전체의 힘이 강해짐을 느낀다. 함께 실패하는 날도 있지만, 그 속에서도 배우고 서로에게 의지해서 새로 시작할 힘을 얻는 것이다.

배추 모종을 받아서 나누고 얼마나 지났을까? 텃밭이 가을 준비로 가득해진다. 그 사이 세상 근심 모르고 텃밭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꽃 한송이가 잠시 스치듯 눈길에 머문다.

소중하게 맞이한 배추 모종을 정식을 마치고 난 텃밭이 쏟아지는 빗소리와 함께 춤을 춘다. 이제 막 제 자리를 잡기 시작한 배추 모종에게 소중한 단비가 되리라 기뻐하다가, 문득 거세지는 빗줄기에 모종이 다치고 쓰러지면 어쩔까 하는 걱정하는 마음이 동시에 오간다. 아직 걸음마가 서툰 도시 농부는 이렇다. 자연이 주는 작은 변화를 초연하게 바라보며 넉넉한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는 여유가 언젠가는 생겼으면 좋겠다.

이제 막 자기 자리를 잡은 배추 모종이 가을의 풍성함으로 돌아올 때 정도면 도시 농부도 조금은 더 성장해 있으리라 희망을 가져본다.

도시 농부의 일과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도 이어지는 굵은 빗소리가 나에게 말하는 듯하다. 이제는 우리들의 시간이라고. 도시 농부는 할 일을 다했으니 이제 하늘의 배려와 자연의 너그러움을 기다려 볼 때인가 보다.

혜윰뜰 텃밭을 오고 가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와 이름 모를 새소리, 산 언저리의 나뭇잎을 부딪히며 지나가는 바람 소리, 그리고 비와 천둥의 소리까지 모든 것이 순리와 자연에 순응하는 한 편의 공연에 참가한 기분이다. 오늘 혜윰뜰의 하루가 음악처럼 아름다운 시간이었음에 마음에 잔잔한 행복이 차오른다. 🍀

텃밭에서 가지는 사색의 시간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침보다는 발걸음이 많이 무겁게 느낀다. 이런 날이면 필자는 텃밭으로 향한다. 그곳에는 조용한 사색의 시간과 온전한 평화가 있기 때문에.

평생을 살아오면서 이렇게 일상이 뒤바뀌는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얼마전까지 당연하게 생각하고 누려왔던 일상이, 그 평범했던 하루가 사실은 기적 같은 선물이었다는 것을 지금 느끼고 있는 중이다.

올 해는 시작할 때 참 꿈이 많았다. 작년에 본격적으로 시작한 도시농업공동체의 텃밭 경작과 원예 활동이 일년 동안 조금씩 성장하는 것이 보였고, 그와 함께 주민공동체라는 이름도 참 어울리는 모임이 되었기 때문이다. 텃밭이라는 공간을 공유하면서 함께 만나게 된 이웃과 원예 수업과 문화 강좌를 경험하기 위해서 준비도 참 많이 했지만, 사회적 여건으로 인하여 실행을 못하고 있다.

준비한 일을 실천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느낄 기회도 없이, 그동안의 뉴스를 보면서 재난 영화 속의 등장인물 한 사람이 되어서 살아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스스로에게 애써서 평범한 일상이 곧 돌아올 것이라고 말하곤 했지만, 쉽지 않음을 알기에 가끔은 마음 속 생각이 까맣게 그을려 깊이 가라 앉는 기분이 들곤 한다.
이런 날 나는 텃밭으로 향한다.
 
혜윰뜰 텃밭에는 조용한 휴식과 힐링의 시간이 놓여 있다. 날씨 좋은 날이면 낮 시간에 많은 이웃이 작물을 돌보기 위해서 분주히 오가는 곳이지만, 저녁 시간이면 각자의 생활로 돌아가고 텃밭에는 조용한 안식과 같은 고요가 흐른다. 필자는 낮 시간 함께 소통하며 작물을 가꾸는 그 시간만큼이나 저녁 시간의 고요를 사랑한다.

노을이 한참 밭을 물들이는 이 시간이면 작물이 바람에 천천히 흔들리며 평온한 풍경이 열린다. 혜윰뜰 텃밭에는 자연스러운 평화로움이 있다. 흔히 사색(思索)이라고 하면 어떤 일에 대해서 깊이 헤아리고 생각함을 의미하지만, 혜윰뜰 텃밭에서의 사색은 조금 그 의미가 다르다.

혜윰뜰의 사색은 비움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텃밭으로 올라가는 긴 계단길이 끝나면 발걸음을 멈추고 벤치에 앉는다. 텃밭이 참 평화롭다. 어떤 날은 가끔 선물 같은 하늘 풍경이 함께 하기도 한다. 구름 사이로 노을이 텃밭에 스미는 날이면 그 모습에 마음을 빼앗기곤 한다. 작물이 이는 바람에 잠시 흔들린다. 그러면 나는 또 사그락 사그락 작물이 서로 몸을 부딪히며 내는 소리에 온전히 집중한다.

이것이 혜윰뜰 텃밭의 사색이다. 오랫동안 마음속에 쌓여 있던 묵은 생각을 작물의 속삭임과 하늘의 풍광과 바람의 소리에 맡겨서 비우고 정화하는 시간은, 어디서도 경험하기 힘든 특별한 경험이 된다. 잘 가꾼 공원과 산책로와는 또 다른 행복감이 텃밭에는 있다. 아마도 이 곳은 모두의 정성이 담겨서 만들어 낸 공간이기 때문에 더욱 특별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이 시간을 허락해주는 혜윰뜰 텃밭이 참 좋다. 

혜윰뜰 텃밭은 인왕산 등산로 인근에 있다. 타지에서 인왕산을 찾는 분이라면 틀림없이 지나게 되는 길에서 우연히 혜윰뜰 텃밭의 표지를 만나게 된다면 이곳에 함께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숨쉬고 있음을 한번쯤 떠올려 주시면 좋겠다. 우연히 오가다가 마주쳐서 인사 나눌 수 있으면 더욱 더 좋겠다.

이제 가을 농사를 준비하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 다음에는 오랜만에 진짜 도시농부의 농사 이야기를 쓸 기회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

도시농부의 수확과 나눔

2019년 첫 농사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평생을 마트 신선채소 코너에서 잘 다듬어진 채소만 보아 오면서 도시농부를 작은 취미 활동의 하나로 생각하였다가 농사라는 두 글자가 가진 의미를 진하게 맛보았다. 2019년 봄 농사의 시간을 뒤돌아보면 필자는 ‘초보’라는 말을 붙이는 것도 부족할 정도였다.

키우기 정말 쉽다는 상추부터 엉망이 되었다. 상추모종을 너무 깊게 심어서 심고 이틀이 지난 뒤에 가보니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100여명의 이웃이 함께 모여 채소를 키워서 맛보겠다는 소박한 희망도 상추와 함께 소리 없이 사라지는 듯 느껴졌다.

무조건 살리고 싶었다. 상추도, 수확의 희망도. 그래서 이웃들이 함께 각자 공부를 해 나가기 시작했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확인하면 다음날 바로 혜윰뜰 텃밭에 배운 것을 적용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리고 한달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그동안의 노력이 풍성함이라는 선물로 돌아왔다.
 
심은 다음날 다 녹아서 사라진 것 같았던 상추가 불과 한달만에 푸른 잎을 세상에 힘차게 내밀었다. 봄 비가 내릴 때마다 새로운 설렘이 생기기 시작했다. 봄비 내린 다음날 아침 햇살에 빛나는 텃밭을 경험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도시농부만의 그런 기쁨이 삶 속에 찾아왔다.
 
도시농부로 텃밭을 가꾸는 일을 시작하면서 알게 된 것이 한가지 있다면, 그것은 ‘식물도 분명한 언어로 말한다’는 것이다. 식물의 언어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6월 어느 날 새벽이었는데, 일상 생활이 바빠서 하루 이틀을 텃밭을 살피지 못했다. 
 
심어 놓은 작물들이 모두 풀 죽은 모습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6월의 태양이 그렇게 뜨겁다는 것을 평소에는 왜 느끼지 못했을까? 먼 발치에서도 풀 죽은 작물의 아우성이 들려오는 듯 하다. 그동안 왜 오지 않았는지 원망하는 소리가 분명하게 보이는 기분이었다. 초보 도시농부의 맘이 바빠지며 작물이 다시 소생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안고 열심히 물을 주기 시작했다.

이렇게 마음 쓰는 과정을 겪으면서 얻은 수확은 기쁨 그 자체이다. 그래서 혼자 먹기 보다는 초보 농부가 이만큼 키워낸 것이 기쁜 마음은 자연스럽게 이웃과의 나눔으로 이어지고 있다.
 
평생을 도시에서 지내면서 나눔이라는 것은 누군가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라 생각했는데, 자연과 호흡하고 그 속에서 수확을 하면서 도시 농부로서 필자도 조금은 성장하고 있다는 생각에 스스로 대견스러운 생각이 든다. 텃밭에서 성장하는 것은 상추만은 아닌 것 같으니 말이다. 🍀

함께 부르는 노래 (후편)

혜윰뜰 텃밭은 마을주민이 함께 가꾸는 도시농업인의 텃밭이다. 지난편은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방치와 무단점유를 겪은 혜윰뜰 텃밭이 새 생명을 키워내는 공간으로 되기까지의 이야기였다.

오랜 기간 제대로 된 관리를 받지 못한 토양에서 생명을 키운다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처참하게 망가진 콘크리트의 잔해를 걷어내고 흙을 구해와서 텃밭을 만들었지만, 문제가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도시 농업도 농업인지라, 땅을 부드럽게 하고 어린 작물이 뿌리 내리기 쉬운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이른바 로타리 작업이라는 것을 해야 한다. 대단위 농업에서는 이 일을 농기구가 하고 산간오지에서는 소가 하는데 도시에서는 삽 하나 들고 사람이 하는 것이 보통이다. 

로터리 작업을 위해서 모두들 처음 해보는 신선한 경험에 의기양양하게 삽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새 생명이 이제 곧 이곳에서 자랄 것이라는 기대감에, 손에 쥔 삽에 힘이 한껏 들어간다. 그렇지만 혜윰뜰 텃밭은 그렇게 쉽게 자신을 내어주지 않았다. 셀 수 조차 없을 만큼 많은 돌이 초보 농부들의 앞을 가로 막았다. 삽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았다.

어떻게 되찾은 공간인데 돌에 막혀서 이대로 주저 앉을 수는 없었기에, 매일 매일 조금씩 할 수 있는 만큼 돌을 골라내고 땅을 가꾸었다. 한동안 혜윰뜰 텃밭 최대 생산물은 돌이라는 자조 섞인 농담이 있을 정도로 이 시기는 길고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회원 서로 서로에 의지하며 텃밭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2019년 5월 11일, 혜윰뜰 도시농업공동체 회원이라면 잊지 못할 개장행사의 날을 맞이했다. 개장행사 전 3개월 동안 땅을 정비하고 돌을 골라내면서 이 땅에서 과연 작물을 심고 키울 수 있는지 의문이었던 혜윰뜰 회원들의 노력에 텃밭이 어떻 답을 하는지를 듣게 되는 날이 찾아온 것이다.
 
텃밭이 어떤 답을 건네 올까 생각하며 텃밭 한쪽편에 앉아 쉬고 있는데, 문득 귀가 열리면서 다양한 소리가 들려왔다. 회원들이 서로 모종을 건네며 나누는 덕담, 어린 회원이 작은 물조리개로 방금 심은 작물에게 물 주면서 불러주는 자장가 노랫소리, 그리고 가끔씩 ‘여기 아직도 돌이 이렇게 많아!’라고 외치는 어느 회원의 목소리.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혜윰뜰 텃밭은 이미 우리의 의문에 답을 해주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텃밭을 찾는 이웃들의 발걸음 소리에서, 돌을 골라내며 내는 푸념 섞인 한숨 소리에서, 가족과 함께 텃밭을 찾은 어린 회원들의 뛰 노는 웃음 소리에서 이미 텃밭은 답을 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 공간은 이제 우리 모두의 것이고, 함께 모여 텃밭을 일구는 사람들의 소리가 끊어지지 않은 한 혜윰뜰 텃밭은 언제나 땅의 자애롭고 넉넉한 품을 우리에게 열어줄 것이라는 것을 텃밭을 찾은 이웃을 통해 땅은 조용히 답하고 있었다.

이 날 혜윰뜰 텃밭에 잔잔히 스미는 함께 부르는 노래는 저녁 노을이 드리울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

함께 부르는 노래 (전편)

 “와, 심하다. 심해도 너무 심하다.”

서울시 종로구 무악동 86번지는 무악현대아파트의 공유지이다. 필자가 처음 입주자대표가 되고 주민의 제보로 방문한 그곳은 그야말로 난장판 그 자체였다. 약 10년 가까운 기간 동안 공유지를 무단 점유하고 있던 이들은 이곳을 온갖 쓰레기의 무덤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과거에는 무단점유한 주민이 공유지에서 쓰레기를 태우다가 화재로 번져서 소방차가 출동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무악동 86번지는 말 그대로 공유지의 비극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공간이었다.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이 공유지의 비극을 극복하고 공동체의 공유지, 그것도 생명을 키우는 공동체의 텃밭으로 바꾸기까지의 이야기이다. 
 
2018년 8월 무더위가 한참이 그날 사람의 끝없는 이기심을 보았다. 공유지인 무악동 86번지를 무단점유 하던 주민에게 점유행위 정리를 요구하자 오히려 공유지의 수목을 꺾어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말았다. 오랫동안 원만하게 상황 해결을 위해서 대화를 시도했지만 이날 입구를 막아 놓은 공유지를 보고서 스스로 마음이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공유지를 복구하겠다는 그동안의 희망을 내려 놓고 그만두기로 마음 먹은 날, 생각하지 못한 소식이 들려왔다.
 
그동안 무단점유를 하고 있던 주민이 바리케이드를 철거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궁금함에 사무실 업무를 던져 놓고 한걸음에 현장에 왔다. 그리고 공동체의 이야기를 시작한 계기가 되는 기억에 남는 대화가 시작되었다.

무단점유 주민과 긴 시간동안 대화가 이어졌다. 사과도 받았다. 그동안 대화를 시도했던 필자가 무악현대아파트의 입주자대표회장 이라는 것을 몰랐다는 사과였다. 회장에 대한 예의 같은 것이 중요하지는 않았지만, 회장이 요구하여서 물러설 때라고 느꼈다는 말에 처음으로 회장이라는 역할을 맡은 보람을 느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해당 주민도 과거 공유지를 노숙인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나섰다고 한다. 그렇게 몇 년을 지키다 보니 땅에 대한 애착이 생겼고, 그 애착이 점유로 이어진 것이었다. 일년을 넘는 시간 동안 무단점유를 해소할 생각만 했지만, 왜 그렇게 하고 있었는지는 들어볼 생각을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단점유를 해결하고 난 뒤 6개월 동안은 이웃과 함께 청소만 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우선 공간을 비워내야 한다는 생각만 했던 것이다. 그렇게 반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공유지는 가능성과 함께 어려운 과제도 함께 안겨주었다. 공동체를 위한 텃밭이나 생태정원으로 가꾸겠다는 열의와 희망으로 노력했지만, 막상 청소를 하고 보니 공유지 공간은 온통 콘크리트의 산이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달 동안 구청을 다닌 것 같다. 주민의 힘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행정에 도움을 구한 것이다. 혼자서는 목소리를 낼 방법이 없어서, 당장 경작할 수 있는 텃밭도 없는 상태에서 주민과 함께 도시농업공동체를 만들었다. 그 공동체가 혜윰뜰 도시농업공동체의 시작이다. 도시농업공동체로 모여서 행정에 도움을 구하니 행정에서도 주민의 진심을 봐주기 시작했다. 2019년 3월 어느 날 행정에서 중장비를 이끌고 현장을 찾아왔다. 주민의 힘만으로는 어쩔 수 없던 문제들이 해결되기 시작했다.

새싹 같은 도시농업공동체가 새 잎을 세상에 내밀기 위해 함께 부르는 노래가 시작 되는 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