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아낌없이 주는 나무

핑계일 뿐이지만 고등학교 다니던 날에 공부에 매진하지 않았다. 하고 안 하고는 나의 선택이니 내 선택이 그랬다. 나는 언제나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다. 고등학교 시절의 나도 그러했는데, 공부는 하지 않고 궁금한 것을 찾아보는 것이 일상의 즐거움이었다. 

한동안은 나비효과에 빠져 있었다.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캘리포니아에서 나비가 날갯짓하면 지구 반대편 어딘가에서는 재난이 찾아올 수도 있다는 당시 이론은 무척이나 호기심을 자극했다. 나비효과는 미국 기상학자 에드워드 노턴이 1960년대 초에 기상 관측 중에 착안한 원리이다. 기상학자로서 날씨를 예측하기 힘든 이유를 지구 어딘가에서 일어난 작은 변화로 예측할 수 없는 날씨가 나타난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 나비효과이다. 나비효과는 이후에 물리학에서 카오스 이론의 토대가 되기도 했다.

고등학교 당시에는 인터넷도 없고, 자료 조사는 오로지 도서관뿐이었다. 그래서 도서관을 집처럼 드나들면서도 학업 성적이 매우 좋지 않아서 나는 대체로 머리가 참 나쁜 학생으로 여겨졌다. 남들 모두 중간고사 준비할 때 나는 나비효과나 찾고 있으니 성적이 잘 나올 수는 없었지만, 나에게는 그런 시간이 숨 쉴 수 있는 시간이었고 살아 있다고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이왕 나비효과에 관해서 이야기를 꺼냈으니 흔히 생각하는 오해가 한가지 있음을 설명해야겠다. 나비효과는 작은 사건이 큰일로 변화무쌍하게 번져가는 것을 설명하는 것 같지만, 작은 변화가 늘 큰 변화의 변수로 자라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작고 사소한 나비의 날갯짓이 어딘가에서는 태풍을 불러온다는 것은 항상 있는 일도 아니고, 연관 관계를 충분히 입증할 수도 없는 것이다. 

어쩌면 나비효과에 갖는 관심은 빌미였을지도 모른다. 도서관이 문 닫는 시간까지 있기 위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주제를 정하고 조사하고 기록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런 날은 저녁도 건너뛰는 일이 일상이었다. 배는 고프고 머리는 무거웠지만, 적어도 두려움에 떨지는 않아도 되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일상처럼 찾아오는 폭언과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발길질에 두려움에 갇혀 있는 시간이 나에게는 지옥처럼 느껴졌기에 그 시간을 피할 수 있는 도서관이라는 장소는 나에게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는 안식처이고 피난처였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많은 책을 읽을 기회도 되었다. 어떤 날은 아무 코너나 가서 눈을 감고 책 한 권을 골라서 읽고 다시 읽기를 반복했다. 간혹 소설 코너에서 마음에 꼭 들어오는 책을 만나게 되면 그날 하루 동안은 같은 책을 수도 없이 읽었다. 조지오웰의 <파리와 런던에서의 영락 생활> 이라는 책은 기억하기로 80번 이상을 읽었는데, 바닥에 떨어진 누군가의 생활을 읽으면서 나보다 더 힘든 인생에 위로받았다. 나는 당시에 조지오웰이 동물농장을 쓴 작가라는 것도 알지 못했는데,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가 되었다.

도서관은 당시 나에게 피난처이자 안식처이고 여행지였다. 한동안은 추리소설에 빠져 살았는데 당시까지 나온 추리소설은 한 권도 빼놓지 않고 읽었던 기억이다. 유명한 작가의 작품도 있었지만, 용감한 형제 시리즈와 같이 세상 사람이 잘 모르는 작품까지 정말 탐독했다. 이 시리즈는 모험 집과 비슷했는데, 시리즈마다 유명한 해외의 새로운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작품 속 도시를 묘사하는 장면에 매료되어 주인공과 함께 그 도시를 마음속에서 거닐곤 했다. 어떤 날은 얼마나 심취했는지 읽던 책을 놓고 싶지 않아서 화장실에 숨어서 책을 보기도 했다. 그날은 두려움보다 흥미에 빠져 행복했다.

어느날인가 두 권의 책을 손에 잡았는데 그 책은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작품과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다. 당시 나는 잦은 폭력에 마음이 죽어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될 수 없을 것이고 무엇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매일 듣는 말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새끼’였으니까. 사람이 같은 말을 10번 정도 들으면 그 말이 나를 욕하는 것이라면 화가 난다. 백번 정도 들으면 나에게 혹시 문제가 있나 생각해보게 된다. 만 번 정도 들으면 그 말이 곧 내가 된다. 나는 십만 번 정도 그런 말을 들은 것 같다. 나는 부모님 두 사람 불화의 원인이고 씨앗이고 결과물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새끼로 사는 운명이라는 것을 일찍부터 믿었다.

"You'll be a beautiful butterfly - we’re all waiting for you!"
"너는 아름다운 나비가 될 수 있어. 우리 모두가 너를 위해 기다리고 있는 거란다!"

<꽃들에게 희망을> 작품에서 아직도 생각나는 문장인데, 나는 저 문장을 읽고 참 오랫동안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아주 조금의 기억을 되돌려 생각해보면 애벌레로 살다 밟혀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그런 희망을 태어나서 처음 하게 되었다. 그 한 번으로 내 인생이 극적으로 달라지지는 않았고, 만 번을 들은 말을 다시 한번 더 듣는 날에는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나는 아름다운 나비가 될 수도 있고 애벌레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에서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보이는 곳마다 메모를 써서 붙여 놓고 잠들기 전에는 같은 문장을 계속 되새기면서 잠들곤 했다.

그리고,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읽고 인생의 목표가 생겼다. 죽지 말고 살아서 어른이 되자는 아주 사소하고 소박하고 목표라고도 할 수 없는 목적지였다. 한가지 바람이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적어도 아픈 말로 난도질하지 않고 보듬어 줄 수 있는 그런 어른이 되었으면 하는 희망이 생겼다. 돌아보면 나는 사랑받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받지 못한 것을 제대로 줄 수 있을지는 그 어린 나이에도 의문이 들었지만, 그래도 나는 어른이 되어서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자는 목표를 내려 놓지는 않았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나무는 결국 그루터기만 남는다. 그늘이 되어주고 열매 맺어 과실을 주고 가지도 모두 주고 나중에는 밑동만 남게 되지만, 사랑하는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노년이 된 아이가 왔을 때 남아 있는 그루터기에 앉아서 쉬는 마지막 장면이 사랑하는 감정을 제대로 배워보지 못한 나에게는 정말 큰 사랑으로 다가왔다.

「“미안하다. 무엇이든 너에게 주고 싶은데. 내게 남은 것이라곤 늙어빠진 나무 밑동뿐이야. 미안해.” 나무가 말하자 늙은 남자는 “내게 필요한 것은 없어. 앉아 쉴 자리만 있으면 좋겠어.” 나무가 대답합니다. “앉아 쉬기에는 늙은 나무밑동보다 더 좋은 곳은 없지. 이리 와서 앉아 푹 쉬도록 해.” 남자는 시키는 대로 나무밑동에 걸쳐 앉았습니다.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이정표가 되었다. 언젠가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누군가를 알게 된다면 바라는 것 없이 주는 것이 인생에 큰 목적지가 되었다. 지금 나는 그 길을 선택해서 걷고 있지만 결론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사랑받아보지 못한 이가 주는 사랑이 올바르지 않아서 줄 곳 없는 마음으로 끝날지, 우연히도, 아주 우연히도 그 마음이 올바르게 자라서 그늘이 필요하고 과실이 필요하고 가지가 필요한 이에게 행복의 기초가 되어줄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바라는 것이 있다면, 수십 년 전 도서관에 숨어 세상에서 도망만 다니던 그 시절의 내가 희망한 것처럼, 나에게 희망과 용기가 되어준 한 그루 나무처럼 누군가에게 희망과 용기의 씨앗이 되어줄 수 있다면 좋겠다.

바라는 것은 그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