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미처 하지 못한 말

아내와 처음 만난 때는 1995년 봄이었다. 91년 대학에 입학하고 몇 년간을 방황과 교통사고로 보내고, 대학은 마치고 보라는 주변의 말에 따라 95년에 복학했다. 학번은 91학번이었지만, 1학년 1학기도 마치지 않고 휴학을 했기에 그 당시 1학년인 95학번과 같이 마치 1학년처럼 새 출발 했다. 복학생이라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았던 나는 95학번 후배들에게 91학번임을 밝히지 않고 지냈다. 우연한 기회에 드러나서 알게 되는 후배도 있었지만, 어떤 후배는 졸업할 때까지 내가 95학번 동기인 줄 알기도 했다. 후배들의 ‘선배 밥 사주세요.’라는 소나기를 맞을 일이 없어서 편하기도 했지만, 가끔 학교 축제에서 술 취한 93학번 후배들이 군기 잡으려 후배들을 소집하면 소집장소에 나가서, 야간에 이른바 얼차려를 받기도 했다. 원래 성격이 위아래를 크게 구분하는 편이 아니라 후배에게 받는 얼차려는 신선한 느낌이라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전공은 인문계열을 선택했지만, 그 당시 한창 보급되기 시작했던 PC로 할 수 있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작은 컴퓨터 동아리를 만들어서 대학 과제를 인터넷 조사해서 편집한 인쇄물로 만드는 과정을 독학했고, 그 방법을 후배들에게 알려준다는 소문이 나면서 작은 동아리는 문전성시를 이루기도 했다. PC로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무엇일까 알아보던 중에 선택과목 중에 CAD 수업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3D 게임에 한창 빠져 있던 중이라 3차원을 그래픽으로 구현해낸다는 과정이 흥미로워서 아무 기초도 없었음에도 덜컥 수강 신청을 했다. 물론 학점을 잘 주는 맛집이라는 소문과 함께 3학점이라는 점도 CAD 수업을 신청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첫 수업에 참석하고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은 했지만, 3D 그래픽을 다루는 CAD 수업은 어느 정도 기초를 갖춘 전공학부의 교양과목이라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다. 그래서 첫 수업이었지만, CAD 프로그램의 구성이라거나 기초적인 도구의 사용에 관한 부분은 생략하는 분위기였다. 수업은 온통 모르는 얼굴뿐이라 모두 전공과목 학부생 사이에서 혼자 모른다고 할 수 없어서 첫 강의는 아는 척하면서 듣고 지나갔다. 그러면서도 앞자리에서 열심히 듣다 보면 뭔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강의실 맨 앞자리에 앉아서 못 알아듣는 설명을 연신 고개를 끄덕여가며 이해하려 애썼다. 두 번째 강의 날에도 맨 앞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는데, 뒤쪽에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말이나 글로 설명하기 어려운 잡아당기는 어떤 기분이었다.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니 처음 보는 여학생 한 사람 앉아 있었다. 그때 앉아 있던 강의실은 긴 테이블을 세로로 하나로 연결해둔 형태였는데 맨 앞자리에 내가 앉아 있었고 맨 뒷자리에 여학생이 있었고 그사이에는 아무도 앉지 않았다. 아직도 그날의 이상한 경험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데,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순간, 공간이 접히기 시작했다. 둘의 거리가 꽤나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상대가 자세히 보이지 않았기에 얼굴을 알아보거나 한 것도 아니었는데, 호흡과 시간이 멈춘 듯 공간이 접히면서 한 사람에게 모든 신경이 몰입되는 경험은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그전에도, 이후부터 지금까지도 다시는 경험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당시에는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도 알 수 없었지만, 그 사람과 인사는 나누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초등학교 이후로는 남중, 남고를 나오면서 소개팅 한번 해본 일이 없는 나는 자연스럽게 이성에게 다가가는 분야의 교양이라고는 모래 한 알만큼도 없었다. 평소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몰입하는 편이라서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 사람과 친밀한 노력을 할 기회도 없었다.

대화 나눌 기회는 아주 우연히 찾아왔는데, 같은 과 후배가 여학생의 친구에게 관심이 있었고, 친구에 관한 컨설팅을 여학생에게 요청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공존할 수 있는 대화 목록이 만들어졌다. 나는 영문과, 그 여학생은 사학과 출신으로 둘 다 문과대 출신이었기에, CAD 수업을 듣는 유일한 문과생이라는, 동지로서도 나눌 이야기도 늘어갔다. 서로 수업에 못 가는 날이 있으면 수업 내용을 공유해주고 과제를 도와주면서 친분도 생겼다. 후배가 부탁한 여학생 친구에 대한 컨설팅도 비교적 잘 되어서, 컨설팅해준 보답으로 식사할 기회도 얻으면서 처음의 이상한 공간 압축 경험은 호감으로 번져갔다. 그렇지만, 여학생이 먼저 졸업하면서 연락 나눌 기회가 줄어들었고 나도 졸업과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인연은 그렇게 멀어진 것으로 생각했다.

어느 날 아침 처음 만난 그날이 생생하게 다시 떠올랐다. 머리로 생각하기에 앞서 손이 학교로 전화를 하고 있었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그 사람 연락처를 알게 되었고, 덕수궁 앞길에서 사회생활 하는 직장인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다시 만난 날부터 여러날 뒤에 우리는 서로를 인생의 반려자로 선택하게 되었다. 지나고서 생각하면 첫 만남에서 공간 압축과 시간 멈춤의 경험이 없었다면 그렇게 적극적으로 함께 하기 위한 노력을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만 아는 사람이 누군가의 반려자로서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더 앞서서 한발도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만남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번 생의 인연이라는 확신부터 느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일생을 그렇게 성실하게 사는 편이 아닌지라, 사회생활이 순탄하지 않았다. 실직하는 때도 많았고, 게으름으로 사회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 살아갈 자리를 열심히 찾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그렇게 심하게 쓰러지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던 이유에는 수십 년 전 만난 그 여학생, 지금의 아내가 있기 때문이다. 아내를 만나고 삶의 신조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아내 앞에서 할 수 없는 일이라면 아내가 없는 곳에서도 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이 신조는 생각보다 큰 힘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나고 보면 후회로 남았을 잘못된 선택지를 만날 때마다 기가 막히게 피해 가는 처방전 같은 효과가 있었다. 누군가 그 사람이 바라보지 않을 때조차도 그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으리라는 맹세는 꽤나 큰 힘이 있다.

대학 시절 나는 삶의 목적이나 의미와 같은 추상적인 문답에 심취해 있었는데, 명료한 답을 얻지는 못하고 젊은 날이 지나갔다. 그 뒤로 작은 교통사고를 3번, 일 년 가까이 병원 신세를 져야 했던 큰 교통사고를 한번 겪었다. 살면서 짐승에게는 두어 번 물려서 그때마다 봉합 수술을 받았고, 배달차와 충돌해서 머리가 깨지기도 했다. 뇌종양으로 항암 치료를 하면서 살짝 사선을 넘나드는 경험도 있었다. 열정으로 시작했던 일은 생각대로 안 돼서 경제적인 실패를 마주하기도 했다. 그런 때마다 대학 시절 가장 괴롭히던 질문이 떠올랐다. 인생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어느 일요일 오전, 늦은 아침을 준비하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모습이 창가에 비치는 햇살과 함께 참 아름다웠다.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이 순간이구나’ 알 수 있었다. 내 오랜 질문에 대해 이미 나만의 답안을 가지고 있음을 말이다. 내 인생의 과정은 아내를 만나면서 얻은 신조로 굳건해졌고, 인생의 완성은 아내와의 만남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그날 아침 햇살 속 아내의 뒷모습에서 알 수 있었다. 앞으로 더 할 수 있는 일과 해내고 싶은 일이 놓여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모든 일은 내 인생에서는 덤과 같은 것이다. 생의 목적은 아내를 만나서 살아온 것으로 이미 완성되었다. 그래서 이루지 못하고 실패한 많은 것이 부끄럽지 않고, 이룰 수 없는 또 다른 많은 것들 앞에 절망스럽지도 않다. 이미 완성되어 마침표를 찍은 원고에 덤으로 쓰는 것들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부록과 같은 것들이기에.

그렇지만 아내에게 그날 아침 이 마음을 차마 전하지 못했다. 온갖 이야기를 늘 쉽게 아내에게 꺼내놓는 나였지만, 이말 만큼은 쉽게 할 수가 없었다. 살아오면서 내가 아내에게 한 무수한 말의 가시밭을 아내는 묵묵히 걸어왔다는 것을 알기에 이 마음만큼은 가벼이 내보일 수가 없었다. 평생 내가 했던 가벼운 말 중 하나로 가라앉아 사라질 것이 걱정되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그래서, 차마 말로 하지 못한 한 문장을 진심을 담아 글로 전하고 싶다.

당신으로 인해 내 인생은 충분히 아름답고 행복했음을. 당신 덕분에 오랜 의문에 답을 얻을 수 있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