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 가을이 아쉬운 시간이다. 가을 농사를 마무리하는 시절이라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한다는 안도감과 그래도 못다 한 것에 대한 아쉬운 마음이 교차한다. 이번 해에 혜윰뜰 텃밭에는 유독 곤충이 많아졌는데, 그 덕분에 도심에서는 듣기 어려운 다양한 새소리의 하모니를 즐길 수 있는 것은 감사한 일이었지만, 새를 부르는 곤충의 주식이 되는 가을 작물을 키우는 도시농부에게 유쾌하지만은 않은 경험이었다. 아무래도 지난 3년 동안 친환경 자연농법을 지켜보겠다고 안간힘을 쓰며 독한 약은 사용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곤충 세상까지 알려진 모양이다.
올가을 초반에 벼룩잎벌레 피해가 컸다. 벼룩잎벌레는 십자화과 작물 어린 모종을 탐하는 곤충인데, 워낙 작고 재빨리 톡톡 튀어서 사라지기 때문에 사람의 능력으로는 잡기 어려운 곤충이다. 이 녀석들은 성충으로 월동을 한 뒤에 다음 해 봄이 오면 산란을 하는데 한 달 동안 한 마리의 벼룩잎벌레가 낳는 알이 200여 개나 된다. 가을 농사 시작 전에 특별한 방제를 하지 않은 탓에 가을 농사 시작과 함께 벼룩잎벌레에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처음 벼룩잎벌레가 보이기 시작할 때는 이를 가벼이 여겼다. 왜냐하면, 벼룩잎벌레는 성충도 2m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제깟 녀석이 아무리 먹어봐야 얼마나 먹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방심한 것이다. 한 마리가 200여 개의 알을 낳는다는 것을 알았다면 사람 없는 시간에 대가족이 모여서 맛있는 무, 배추의 어린잎을 탐할 것에 대비했을 텐데, 3년이 지나도 초보 농부의 티를 벗어나지 못했다. 벼룩잎벌레는 도심에서는 특별한 천적도 없고, 모종의 연하고 어린잎을 가해하기 때문에 모종이 성장할 기회를 앗아가 버린다. 작다고 가벼이 볼 수 없는 녀석들이다. 표피도 딱딱해서 친환경 방제만으로는 해결이 잘 안 된다.
올해는 종로구 텃밭 관리사에게 긴급한 자문을 구한 끝에 전문 방제 작업을 했다. 그래도 사람과 자연에 해가 적은 저독성 방제를 했지만, 본격적인 방제 처리를 한 것은 처음이라 걱정되는 마음도 있었다. 혹여나 함께 이용하는 어린 이웃에게 작은 피해라도 갈까 싶은 마음이었다. 다행히 큰 문제 없이 방제 작업은 마무리되었고, 벼룩잎벌레를 텃밭에서 쫓아내는 것도 성공적으로 보였다.
벼룩잎벌레를 쫓아내고 2주 정도 지난 뒤 생각하지 못한 일들이 나타났다. 지난해에는 볼 수 없었던 다양한 곤충이 새롭게 등장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도시농부나 베란다 원예 활동을 하는 이에게 반갑지 않은 손님, 진딧물도 대거 나타났다. 대거라는 표현은 풀어서 쓴다면 어린 새순을 뒤덮을 만큼을 의미한다. 가을 농사에서는 절대 반갑지 않지만, 눈에 보이면 하염없이 바라보게 만드는 배추흰나비도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아마도 몰려들었다기보다는 혜윰뜰 텃밭에서 태어나서 먹고 자란 것이리라.
왜 이렇게 배추흰나비와 못 보던 곤충이 늘었을까? 그 질문의 답은 금방 얻었다. 방제를 했기 때문이다. 혜윰뜰 텃밭을 방제하면서 말썽 피우던 벼룩잎벌레를 쫓아내서 어린 모종의 위기를 해결하는 일은 성공했지만, 그와 함께 농사에 유익한 익충까지도 함께 쫓아버린 것이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고 익충과 해충이 다 함께 손잡고 돌아오면 좋으련만 세상일은 그렇게 뜻한 대로 되지 않는다. 익충은 보이지 않고 해충이라 부르는 개미, 진딧물, 배추흰나비가 천적이 사라진 곳에서 주인행세를 시작했다. 이런 상황이 되고 보면 어떤 선택이 최선인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자연은 언제나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것을 잠시 잊은 도시농부의 오만이 가져온 결과를 곱씹어 보는 것이다. 도시농부의 농사를 위한 노력과 그에 따라 살아남으려는 온갖 것들의 반작용에서 삶의 이치를 느낀다.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이러한 작용과 반작용을 베란다 정원에서도 경험한 일이 있다. 아끼는 지인이 지난해 선물해준 알로카시아 나무가 있는데, 처음 받았을 때부터 키가 나보다 더 큰 나무였다. 실내에 두기는 장소가 마땅치 않아서 베란다에 내다 놓았더니 여름이 되자 새로 나는 잎이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작아진 잎이 심지어는 점점 더 옅어지기까지 했다. 알로카시아는 잎이 크고 넓어서 마치 코끼리 귀를 닮았다고 할 정도로 잎이 특징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는데, 여름 태양 아래 내놓으니 작고 볼품없는 잎만 내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반년이라는 시간을 의문을 가지고 지켜보다가 물주기를 잘 못 해서 뿌리가 썩어 나무가 쓰러지는 일이 생겼다. 지인에게 미안한 마음에 버리지도 못하고 지켜보다가 어떻게든 살려보자는 생각에 썩은 부분을 잘라내고 새 흙을 챙겨서 무작정 다시 심어 보았다. 그리고, 너무 햇빛이 강하지 않은 반양지 실내로 들여놓고 몇 달 정성을 다해보았다. 하나 남은 잎이 맥없이 쓰러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며 지켜보았는데, 다행스럽게도 잎에 물을 맺히기 시작하더니 새로운 잎을 내고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새롭게 나온 알로카시아 잎은 원래의 그것만큼은 아니지만, 작고 옅은 부모 잎보다는 훨씬 더 짙푸른 녹색과 큰 잎으로 자라고 있다. 학문적인 이유는 모르지만, 아마도 알로카시아에는 ‘적당한’ 정도의 햇빛만 있으면 충분한 모양이다. 햇빛이 넘치는 곳에서는 옅고 작은 잎으로 적당히 광합성을 하기 위해서 작은 잎을 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일을 경험하고 보니 자연을 상대하는 많은 일이 점점 더 조심스러워진다. 햇빛 충만하면 더 좋을 것 같았던 알로카시아를 향한 나의 무지한 사랑은 식물에 힘든 고통을 주는 일이 되었고, 벼룩잎벌레를 쫓아내는 도전은 익충까지 몰아내면서 더 많은 해충을 불러오는 반작용을 낳았기 때문이다. 깊이 고민하지 않으면 그만인 일이겠지만, 많은 도시농부 이웃과 함께 하는 나로서는 무엇하나 가볍게 내려놓을 수가 없다.
이런저런 생각과 고민을 하면서, 가을 농사가 잘 안되면 속상할 이웃 도시농부에게 해충과 싸움을 너무 소홀히 하여 미안한 마음을 전했더니 의외의 말이 되돌아왔다. 안될 것으로 보이는 상황에서도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면 그 결과의 크기에 관계없이 충분히 행복한 일이라 하신다. 그 한마디 말에 포근한 위안이 찾아왔다. 할 만큼하고 얻은 만큼 만족한다는 마음에서, 자연을 벗 삼아 살아온 지난 3년 시간의 내공이 느껴졌다. 혜윰뜰이 여전히 도시농부로서 서툴고 갈 길이 멀다고만 생각했는데, 자연의 사계절을 충분히 담을 만큼 마음 품이 넉넉해진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게 참 좋다. 🍀
씨았나눔 후 잘 자란 새싹
알로카시아는 동남아시아 열대지방이 원산지인 관엽식물이다. 원산지에는 약 70여 종의 알로카시아가 있다고 하는데, 국내에 대표적으로 알려진 종은 ‘알로카시아 오도라’이다. 공간감이 있는 실내장식 목적으로 넓게 사랑받고 있는 식물이다. 알로카시아라는 이름이 생소한 경우라도 카페 실내장식 용도로 놓여 있는 잎 넓은 식물을 본 일이 있을 것이다. 알로카시아는 천남성과 식물로 토란과 같은 과의 식물이라, 토란 잎을 본 분이라면 알로카시아의 잎과 많이 닮았음을 발견할지도 모르겠다. 토란과는 잎이 가족처럼 닮았지만, 독성이 있어서 먹을 수는 없는 식물이다.
알로카시아가 비록 국내에서 실내장식 관엽식물로 폭넓게 사랑받는 식물이기는 하나, 원산지인 열대지방에 맞춰진 성장 환경 때문에 잘 키우는 것이 마냥 쉬운 식물은 아니라는 것이 개인적 생각이다. 그럼에도 어느 집에서 개업한다고 하면 가장 먼저 선물용으로 떠오르고, 식물 좋아하는 지인에게 화분 하나 선물할 기회가 오면 선뜻 알로카시아를 선택하게 되는 이유는 이 식물이 가진 공기정화 기능, 넓고 시원한 잎이 보여주는 아름다움, 너무 많지 않고 서너 장 잎으로 연출하는 단정한 공간감 등에 이유가 있지 않은가 싶다. 한 마디로 잘 키운 알로카시아는 참 보기가 좋다.
알로카시아에 대해서 조금 아는 듯 말했지만, 실상 이 식물의 이름을 올해 처음 알게 되었다. 지난해 지인이 너무 게을리 지내지 말고 식물이라도 돌보라고 보내준 것이 알로카시아였다. 식물을 받고 실내에 두라는 지인의 조언에 따라서 거실 적당한 곳에 두고는 물을 흠뻑 주었는데, 잎에서 연신 물이 비 오듯 떨어진다. 물을 많이 준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연신 땀을 쏟는 식물을 베란다에 꺼내 놓았는데, 이때부터 무지한 자의 실수가 이어졌다.
알로카시아는 원산지가 열대지방이기는 하지만, 뜨거운 햇살과 알로카시아는 썩 잘 어울리지 않는다. 햇살이 내다보이는 그늘진 반양지에서 더욱 잘 자라는 식물이다 보니 햇살 쏟아지는 베란다에 내다 놓자 잎이 흐려지고 작아지기 시작했다. 양분이나 수분이 부족해서 그런가 하는 생각에 영양분도 주고 물도 자주 주었지만, 상태는 나날이 나빠지기만 했다. 식물이 약해지니 응애가 발생하기도 했다. 응애는 발음이 귀여운 이름과는 달리 한번 발생하면 처치가 곤란한 충해인데, 이웃에 있는 원예학 박사에게 조언을 구해서 다행히도 응애는 퇴치했다.
그러고는 곧 겨울이 닥쳐 왔지만, 베란다에 내다 놓았던 알로카시아를 집안에 들여놓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공동주택 베란다 정도면 햇볕도 들고 많이 따뜻해진 한국 겨울 날씨 정도는 이겨내리라 생각을 한 것이다. 그렇게 맞이한 겨울은 참으로 혹독하게 추웠다. 추위가 극심하게 이어지고 며칠이 지나고서야 베란다 내다 놓은 식물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내다본 베란다에는 녹색 빛이 한 줌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날 이 식물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되었다. 어떻게 조치해야 할지 찾아보던 중에 이 식물이 알로카시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열대지방 식물이 혹한 속에서 생명을 태우는 동안 포근한 침대 안에서 그 존재를 까맣게 잊고 지낸 게으른 자가 일으킨 현실은 참혹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바보 같은 짓도 했는데, 온통 갈색으로 변해 있는 알로카시아에 햇빛은 필요할 것 같아서 베란다에 내놓은 상태로 비닐을 씌워 찬 바람을 막아 주었다. 그 상태로 봄이 오고 창밖에는 푸른 세상이 돌아왔지만, 베란다 알로카시아에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갈변하여 굳어 있는 알로카시아를 그대로 둔 것은 순수하게 게으른 이유였다.
게으름도 어느 순간에는 일종의 미덕이 되는 것인지, 봄기운이 완연한 휴일 아침 베란다 청소를 하면서 식물을 살펴보는데 작디작은 새싹 같은 봉우리가 보였다. 그즈음에는 알로카시아 키우기에 대해서 조금 알게 된 터라 겨울 동안 실수에서 배운 지식을 동원해서 돌봐주었다. 한번은 본 적 없는 잎이 나기도 했다. 그것을 보고 ‘겨울 동안 그렇게 고생을 하더니 잎이 좀 상했나 보다’ 생각하고 그대로 두었는데 잎이 아니라 꽃대였다.
평소대로의 나였다면 무심히 두었겠지만, 그 겨울을 견디고 꽃 피우고 열매 맺은 알로카시아가 고마웠다. 열매를 조심스럽게 받아서 어찌할까 고민을 하다가, 이 열매를 생명으로 키워줄 이웃을 만나면 좋겠다는 생각에 수소문 끝에 몇몇 이웃에게 나눔을 했다. 그렇지만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는데, 씨앗을 나눔 받는 이웃의 정성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씨앗을 받아낸 것이 나였기에 제대로 했는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눔이 있고 한 달 뒤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싹 틔운 알로카시아 열매를 보니 그 겨울 다 죽은 것으로 생각했던 식물의 생명력에 경이로움이 느껴졌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는데, 얼마 뒤 씨앗을 나눔 받은 이웃이 보내온 소식에는 또 다른 생명의 신비로움이 담겨 있었다. 싹을 틔운 알로카시아 열매 중 하나가 흰색 잎을 내밀고 있다는 것이다. 겨울 동안 너무 고생해서 이상한 씨앗이 나온 것인가 싶어 원예학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하니, 종자로 파종하면 그런 변종이 나오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알로카시아 경우에는 흰색 무늬가 도는 개체는 흔하지 않기 때문에 조금 더 대접을 받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경우는 알로카시아 키우는 일에서는 흔치 않은 경험이라고 한다. 나에게 알로카시아를 선물해준 지인은 10년을 키우는 동안에 열매를 본 일이 없다고 했다. 어쩌면 알로카시아는 주변 환경이 풍요롭고 넉넉할 때는 열매 맺을 생각을 하지 않다가, 혹독한 환경이 되면 그제야 다음 세대를 남기기 위하여 힘겨운 열매 맺기를 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열매를 얻어간 이웃에게서 어느 날 연락이 왔다. 잘 키운 새싹 몇 개 다시 나눔 해주겠다는 말에 잘 키울 자신이 없었던 나는, 애정을 갖고 돌볼 수 있는 새로운 이웃에게 나눔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솔직히 이야기했다. 다행히 본마음을 잘 이해한 이웃은 그렇게 하리라 약속해 주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좋은 반려인을 만나 잘 자라고 있을 알로카시아의 새싹이 또 다른 이웃을 찾아갈 날도 곧 올 것 같다.
지인이 알로카시아를 선물로 보내주었을 때는 그 식물 씨앗을 받아서 나눔 하리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새싹이 늘 푸른 것만은 아니라는 것도 그렇다. 알로카시아를 통해 식물의 생명력, 변화의 힘을 배우는 과정이 즐겁다. 씨앗을 소중히 새로운 생명으로 키우는 이웃이 있음도 기쁨이다. 생명 탄생 기쁨과 나눔의 행복을 알게 해주는 알로카시아 이펙트가 어디까지 번져갈지, 앞으로의 날이 더 기다려진다. 🍀
가을 농사 시작할 때 이야기다. 도시농부에게 있어 가을 농사란 본격적인 농사의 시작이라, 가을은 흥분과 기대가 교차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혜윰뜰은 도시농업공동체이다 보니 장점과 어려운 점도 공존한다. 혜윰뜰은 함께 하는 목적이 비교적 뚜렷하다. 도시농업공동체이니 그 이름에 걸맞게 경작과 수확이 첫 번째 목표이고, 공동체 공간을 30여 세대가 함께 가꾸는 마을 돌봄 활동이 두 번째라 할 수 있다. 활동을 이어가다 보니 때로는 넘치는 수확물을 보람있게 사용하기 위해 나눔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그것도 함께하는 마을활동의 장점이다.
도시농부 활동이라는 뚜렷한 목적이 때로는 난관이 되기도 한다. 가을 농사는 도시농부에게 수확의 기쁨뿐 아니라 병해충의 고난도 함께 안겨주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알면서도 좀처럼 해결할 수 없는 일상의 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도시농부의 텃밭 활동에도 어려운 길임을 알면서도 가야만 할 때가 있다. 농부라는 이름을 내려놓지 않는 한에는 말이다. 조금 더 현실감 있는 도시농부의 가을 역경을 그려보기 위해 부족하지만 짧은 지식을 꺼내 보면 도시농부의 가을은 대략 이런 모습이다.
생명을 가진 세상 만물이 그렇듯이 가을 작물도 성장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탄소, 수소, 산소, 질소, 칼륨, 칼슘과 같이 예전에 화학이나 지구과학 수업시간에 들어봤을 법한 것들이다. 가을 농사를 맞이하는 도시농부는 이것들을 잘 살펴보고 보충해줘야 한다. 가장 중요한 질소를 잠시 예로 든다면, 식물이 성장하는데 필요한 단백질의 구성성분이다. 인류사에 질소 비료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인류는 지금과 같은 규모로 번성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중요한 원소인데, 작물이 누렇게 아랫잎부터 시들면 질소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를 생각해봐야 하는 때이다.
영양이 되는 원소 이외에도, 가을 농사를 결정하는 변수는 여럿이 있다. 그중 하나가 토양인데, 재배할 작물에 맞춰서 적정한 토양 산도를 맞춰주는 것이 중요하다. 토양이 지나치게 산성화되면 석회 등을 공급해서 농사 전 중화해 두어야 병해에 의한 큰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 석회를 사용할 때도 지혜가 필요한데, 지나치게 많으면 칼륨이나 질소의 흡수를 방해해서 오히려 농사에 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모든 과정을 완벽히 했다고 생각해도 어느 날부터 작물의 성장이 더디거나, 열매 맺는 작물에 가로줄 균열이 생기고 잎줄기 안쪽이 썩는 일이 나타나기도 한다. 과하게 습해서 그런가, 혹은 너무 햇살이 뜨거워서 작물이 힘들어 그런가 다양한 생각을 하게 되는데, 환경 이외에 미량원소인 붕소 결핍이 있는 것은 아닌가도 살펴야 한다. 때로는 토양이 지나치게 습하면 붕소 흡수가 잘 안 되어서 부족하지 않아도 결핍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래서 가을 농사에는 물주기도 또 다른 중요 변수다. 과한 습기를 막기 위해서 물 주는 시기를 놓치게 되면 가뭄 때와 같이 칼슘결핍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각종 결핍이나 변수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작물 생리장해 현상과 병충해라는 극복하기 어려운 복잡한 숙제가 있지만, 여기서는 이야기하지 않으려 한다. 이미 도시농부에게 있어 가을 농사라는 목표가 얼마나 정복하기 어려운 과제인지는 충분히 보여준 것 같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혜윰뜰에서 가을 농사를 포기한 도시농부가 올해에는 없다. 배추 대신 쪽파를 선택하는 우회 전략을 짜는 이웃도 있고, 올해는 무 농사에 전념하겠다는 전의를 불태우는 일도 있지만, 대부분의 혜윰뜰 도시농부는 이번에도 배추 농사에 도전장을 던졌다. 그 이유는 도시농부에게 있어서 배추는 가을 밭농사의 아름다운 꽃과 같기 때문이다. 앞서 꺼낸 다양한 난관과 걸림돌을 넘어서 수확의 시간을 맞이할 때 얻는 기쁨이 그동안의 모든 고통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다는 말이다.
거기에 더해서, 혜윰뜰에는 가을 농사에 도전장을 던질 수 있는 용기를 가져다주는 또 하나의 힘이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표현하기 조금 어렵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감이고 소통이며, 마을공동체 안에 공존하는 다양성이 가져다주는 생명력이다.
얼마 전 혜윰뜰에는 가을 농사를 위한 작물 선택을 하고 종자 나눔 하는 일이 있었다. 예년에는 모두 한날 모여서 종자를 나눔하고 서로 간 안부도 물으며 가을 농사를 시작했지만, 올해는 그런 모든 과정이 어렵게 되었다. 함께 모이는 것이 어려워지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비대면이라는 이름을 빌려 활동을 이어가고 있지만, 서로 표정 보며 응원 에너지를 주고받는 일이 멈추어서 아쉬운 점도 있다. 앞서 장황하게 설명한 것과 같이 가을 농사는 처음 경험하는 이웃에게도, 이미 그 길로 다녀본 이에게도 어려운 과정이기에 서로를 응원하는 시간은 도시농업공동체에는 중요한 일이다.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혜윰뜰 회원이 신청한 종자를 조금씩 나눠서 작은 봉투에 담아 각 세대 우편함을 통해서 분배하기로 하였다. 혜윰뜰에서는 무, 청갓, 적갓 등을 종자로 파종해서 가을 농사를 먼저 시작하는데, 종자란 녀석들은 터무니없이 그 크기가 작다. 코팅된 종자 하나가 좁쌀만 하여, 나눔을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때가 있다. 무씨를 대략 150개씩 나눔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섬세한 작업 과정이다.
개인적인 이유로 눈이 말썽이다 보니 정밀저울 작은 숫자를 보면서 나누어 담는 일이 쉽지 않게 되었다. 잠시 고민하는 중에 운영위원회로 함께 하는 한 분이 올해 나누어 담는 것을 도와주겠다는 감사한 이야기를 건네온다. 말한 것도 없는데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말 한마디가 든든한 의지가 되었다. 이어서 또 다른 이웃은 나눈 것을 회원 각자 우편함에 전하는 일을 맡아서 하겠다는 배려가 이어진다. 🍀
종자 나누어 담기를 해준 이웃이 임무를 마쳤다는 연락에 찾으러 가보니 이건 보통 정성을 기울인 것이 아니다. 작은 종자를 수량에 맞춰 세어보고 무게를 확인해서 딱 맞게 나눔 해둔 그것뿐 아니라, 약봉지에 담아 밀봉을 하여서 나눔 하기에 참 좋게 해두었다. 덕분에 나눔도 산책하듯이 손쉽게 마칠 수 있었다. 나눔을 마친 다음 날, 함께 하는 대화방에 이런 글을 어느 회원이 올려주었다.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고 헌신해주는 분들이 계셔서 혜윰뜰 농사일이 행복합니다.’
그 글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마을활동은 결국 정성이 전부라는 것을. 사소해 보이는 일에도 정성을 다하는 이웃과 그 마음을 잘 이해해주는 또 다른 이웃이 만나 이해와 감사의 통행이 시작될 때 그것이 어려움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마을활동을 이어갈 힘이 되어 준다는 것을 새롭게 배운다. 그러고 보니, 약봉지에 담은 것이 씨앗 뿐은 아닌 모양이다. 정성과 배려, 그리고 감사의 마음을 고르게 섞은 마을공동체를 위한 명약도 함께 처방해 준 것이 아닌가 싶다. 혜윰뜰 가을 농사의 행복한 수확은 벌써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여름비에 촉촉하게 젖어 드는 혜윰뜰 텃밭
여름 바람은 고맙다. 이렇게 햇살이 뚜렷한 계절이 오면 도시농부에게는 시원한 바람이 흐르는 그늘막처럼 감사한 것이 없다. 햇살 아래서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작물을 보면 흐뭇한 것이 도시농부의 마음이지만, 작렬하는 태양을 견디며 하는 밭일이 쉬울 리는 없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한여름의 바람은 도시농부에게 소중한 존재이다. 이렇게 고마운 것이 여름 바람이지만, 가끔 농부의 마음을 몰라주는 때도 있다. 여름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태풍이 특히 그렇다.
혜윰뜰 텃밭은 그리 넓지는 않지만, 함께 하는 30여 세대가 조금씩 공간을 나누어서 경작하는 도시농업공동체 공간이다. 여름이 오기 전 상추 같은 수확물이 넘쳐날 때는 작물을 함께 모아서 이웃과 나눔도 하고, 푸드뱅크에 기부하는 공동체 활동을 하고 있지만, 경작에 있어서만큼은 참여하는 세대 각각의 자율성을 존중해주고 있다. 작물을 돌보고, 병충해와 싸우는 방법도 그래서 저마다 각각 다르다. 누군가는 손으로 하나하나 눈에 보이는 해충을 잡기도 하고, 다른 누군가는 효과 좋다고 소문난 유기농 재료를 이용하여 해충을 쫓아내기도 한다. 거름이나 비료에 신경 써서 식물 자체의 건강함으로 병충해를 이겨내도록 특별히 정성을 더하는 이웃도 있다.
도시농부 활동을 처음 시작한 첫해에는 함께 경작하고 모두 같은 방법으로 병충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참여하는 모두가 처음 해보는 일이니 어느 길이 올바른지를 알 수 없었기에, 남이 일러준 방법 하나에 모두가 의지하는 일이 많았다. 그 하나의 방법이 효과가 있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애써 경작한 작물이 수확으로 이어지지 않는 속상한 경험도 찾아오곤 했다. 아무리 좋은 방법이라고 해도, 땅은 놓여 있는 곳마다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땅속 성분이 다르고 이용하는 방법에 따라 변화무쌍한 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실수와 실패는 어쩌면 당연한 과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한두 번 실패를 경험하다 보면, 새로운 방식에 도전하는 회원이 나오기 마련이다. 혜윰뜰 텃밭이 가진 땅의 성질을 관찰과 체험으로 이해의 폭을 넓히고, 도시농업지원센터에 토양 성분을 의뢰해서 무엇이 부족한지를 알게 되면서 각자만의 방법으로 경작하는 비법을 직접 만들어내는 회원들이 나타났다. 특별한 도움 없이도 스스로 방법을 찾아서 자연과 공존해나가는 회원들에 감탄하다가도, 이렇게 각자만의 방식으로 제각각 활동하는 우리를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겠냐는 의문이 드는 날도 있었다.
어느 날 바람이 크게 일었다.
여름의 끝자락을 지나던 시기라 방심했던 그 날, 상상하지 못했던 바람이 태풍과 함께 찾아왔다. 방송에서 연일 경고가 나왔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가 아차 싶은 생각에 서둘러 대비를 했다. 날아갈 만한 물건들을 묶어서 단속했지만, 문제는 텃밭 주변에 있는 큰 나무들이었다. 특히 수십 년 전 누가 심어 놓았는지 알 수 없는 오동나무는 20여 년의 시간 동안 한 번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기에 크고 넓은 가지를 수없이 드리우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바람을 마주하면서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마음이 게으른 대표에게 때늦은 책임감이 무겁게 찾아왔다. 당장에 할 수 있는 일이 없기에, 제발 오동나무가 쓰러지지만 않았으면 하는 마음 안고 텃밭을 내려왔다.
태풍에 대비해 단단히 묶어둔 혜윰뜰 그늘막
예상은 했지만, 창문 틈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바람의 울림이 예사롭지 않다. 자기 힘을 이기지 못한 듯 바람은 어느 순간에는 부르르 떨다가, 거세게 창을 흔들어대며 요동치기를 반복한다. 어느 동네의 간판이 날려 갔다는 이야기, 지붕이 떨어져서 차량이 파손되었다는 뉴스가 재난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연이어 들려온다. 하늘은 태풍이 눈앞까지 도착했음을 선전포고라도 하듯이 검은빛으로 물들며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한다. 지금에 와서는 달리할 수 있는 일도 없어서 창문 틈 사이마다 울리는 바람의 괴성을 묵묵히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다투고 경쟁해서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기에 포기할 기회도 없이, 흉포한 불청객이 하루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랄 뿐인 마음으로 지켜보게 된다.
한양도성 위로 태풍 직전 검게 물들고 있는 하늘
태풍에 온 사방으로 쏟아져 내린 오동나무의 큰 가지와 잔해
반갑지 않은 손님이 지난 뒤 최초로 텃밭을 찾은 혜윰뜰 회원 눈에 들어온 텃밭은 폐허와 다름없었다고 한다. 걱정했던 오동나무 큰 가지들이 넓은 잎을 가득 달고 태풍에 실려 온 바람과 함께 텃밭 곳곳에서 요란스러운 춤사위를 펼친 것이다. 작물은 쓰러지고 오동나무 굵은 가지에 밟혀서 처참하게 일그러지기까지 했다. 혜윰뜰 회원의 표현을 빌리자면 망연자실이라는 마음 표현의 의미를 그때 새삼 느꼈다고 한다. 20년 동안 가지를 키워온 오동나무는 잔가지가 하나 없이 가지 하나하나가 커다란 몽둥이처럼 굵고 단단하다. 가을 농사를 대비해서 금방 심어 놓은 어린 모종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상처가 혜윰뜰에 남았다.
이 일은 이실직고하자면, 전적으로 대표란 자의 실수이다. 안이했다는 죄책감에 마음 둘 곳을 찾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차라리 누구 하나 나서서 ‘네 탓이다’라고 시원하게 꾸짖기라도 하면 덜 미안하련만, 아무도 그런 말을 하는 이가 없다. 큰바람이 지난 뒤 텃밭에서 만난 이웃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조심스럽게 실수한 마음을 드러내며 이해를 구하려 했다. 그런데 뜻밖의 말이 돌아왔다.
“괜찮지 않아요? 우린 그동안 늘 실수를 해왔는데, 실수에 실수 하나 더해진 것뿐이니까요. 늘 하는 실수, 하나 더 한 것 아무 일도 아니에요.”
정말 그랬다. 생각해보면 변화가 있을 때마다 잘못된 선택을 하고, 시행착오의 막다른 길에서 돌아 나오기를 반복한 시간이었다. 누군가 알려준 병충해 방지법을 맹신하고 그것만 믿고 따르다가 크게 낭패를 본 일도 있었고, 고추가 영양균형이 무너져서 시들던 날에는 탄저병이 온 줄 알고 자포자기하려 했던 날도 있었다. 이웃의 말을 듣고 돌이켜보니 나에게 혜윰뜰과 함께 한 날 중, 실수 아닌 날이 없었다. 그 말이 위로로 건넨 말인지, 뼈 있는 농담이었는지 속 깊은 뜻을 알 수는 없었지만, 태풍이 휩쓸고 간 마음엔 작은 평화가 찾아왔다.
폭풍 같은 바람이 지나간 뒤, 혜윰뜰 텃밭은 어떻게 되었을까? 태풍 지난 뒤 텃밭과 작물이 걱정된 회원들이 혜윰뜰을 찾았고,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무거운 오동나무 가지를 힘을 모아서 치우고, 쓰러진 작물을 다시 정성스럽게 일으켜 세우며 회복의 시간을 함께 만들어 갔다. 오동나무가 흩뿌린 잔해를 모두 치우고 작물을 일으켜 세운 그해, 다행히 농사는 큰 무리 없이 수확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태풍이 지난 다음 날, 혜윰뜰 공동체의 치유와 회복을 위한 협력을 보면서 앞서 가졌던 나의 우려가 기우였음을 알 수 있었다.
지금도 창문틈 사이로 바람 쏟아지는 날이면 그때가 떠오른다. 한참을 기억의 상념속을 걷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날이 우리가 공동체로 한 걸음 내딛는 시간이 된 것은 아닐까. 🍀
가을 햇빛 가득 품은 배추, 혜윰뜰 텃밭 배추는 햇빛을 위해 결구하지 않는다
황금 물결이 일렁이는 가을 논은 아니지만, 혜윰뜰 텃밭도 이맘때가 되면 제법 풍성함을 뽐내곤 한다. 누군가는 혜윰뜰 가을 텃밭의 다양함을 두고 텃밭 마트라 부르기도 한다. 가을이 한창인 날 내리는 비와, 아직은 따뜻한 바람이 주는 에너지가 모여 열매가 늘어가는 모습을 보면 도시농부는 행복하다. 그렇지만 방심은 아직 이르다. 잠시 마음을 풀어 놓고 있다 보면 정성을 다한 작물 어딘가 이상함이 보이곤 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작물을 허리 숙여 가까이 들여다보면 곳곳에 숨은 해충이 눈에 들어와 마음이 아파온다.
도시농부에게 있어 가을 농사란 본격적인 농사 활동의 시작이다. 텃밭 농사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가을배추와 무를 키워내는 기쁨이 함께 하는 계절이 온 것이다. 봄부터 여름을 거치면서 한 철 기간 도시농부 활동을 하며 굵어진 손마디에는 가을 농사에 대한 자신감도 조금씩 차오른다. 봄날 늦은 추위와 한여름 내리쏘는 햇살 아래서도 수확의 성과를 이룬 농부에게, 가을이 보여주는 온화함은 때로는 일상의 축복처럼 느껴진다. 자애로운 계절에 잘 자라주는 배추와 무를 보면 농부의 보람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행복한 경험의 시간이 찾아온다.
혜윰뜰 텃밭은 공동주택 공유지여서 단지 내 이웃에게 공간을 개방하여 가끔 텃밭이 궁금한 이웃이 찾아오는 날도 있다. 손님으로 혜윰뜰을 찾는 이웃에게 아마도 가을 텃밭의 푸르름은 꽃처럼 아름다운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특히나 늦은 오후 햇살이 건물 너머로 사라질 즈음에 마주하는 텃밭은 노을빛의 불긋함과 텃밭의 푸르름이 뒤섞여서 보는 이에게 형언하기 어려운 포근함을 안겨준다. 낙조가 맺힌 잎새 끝마디가 한 올 한 올 수 놓은 것처럼 흔들리는 날에는 그 모습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차분한 평온이 온몸에 스며든다.
20일 만에 키워서 먹을 수 있는 적환 무, 여름과 가을 사이 수확하기 좋다
잠시 찾은 손님에게는 평온한 모습만 보이는 텃밭이지만, 텃밭이라는 공간은 마을의 여느 것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얼굴을 가진 변덕스러운 곳이다. 그 이유는 주로 가을 햇살에 있다. 가을 햇살이 작물을 성장시키는 힘을 지켜보면, 하루하루가 놀랍다. 거기에 적당한 온도와 습도까지 잘 유지될 때 성장하는 텃밭은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그렇지만 야속한 자연의 섭리답게, 가을 햇빛은 배추와 무를 키우듯이, 개미, 진딧물, 28 점박이 무당벌레, 무사마귀병에도 성장하기 좋은 환경을 제공해 준다. 작물이 성장하는 속도에 맞춰 해충도 대가족을 이루고, 병해도 하루가 다르게 퍼진다. 해충도 문제지만, 더 큰 어려움은 땅속으로 번지는 병해에 있다. 이들은 가을 낙조의 평화로운 풍경 너머 그늘 속에 숨어서 돌이키기 어려운 숙제를 도시농부에게 던져준다. 그리고 그 숙제를 도시농부가 확인할 때가 되면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 번은 혜윰뜰 텃밭에 무사마귀병이 번졌다. 무사마귀병은 뿌리혹균으로 발생하는데 땅속을 통해서 뿌리 쪽으로 번지기 때문에 증상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확인이 쉽지 않은 병이다. 습한 산성 토양에 기온이 20~25도에서 쉽게 발생하는데 비 잦은 가을 날씨는 이 병에게는 최적의 환경이 된다. 무사마귀병은 주로 십자화과 작물을 가해하는데, 가을 농사에서 만나볼 수 있는 대부분 작물이 이 십자화과에 속한다. 증상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확인이 쉽지 않다고 했지만,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증상 전에는 확인할 방법이 별로 없다.
무사마귀병이 와서 낮 동안 힘없이 쓰러져 있는 배추
늦가을임에도 햇살이 한창인 오후 두 시, 텃밭에 오른 일이 있다. 텃밭을 둘러보는데 유독 두 곳의 배추만 한동안 돌보는 손길이 없었던 것처럼 모든 잎을 늘어뜨리고 지쳐있는 모습을 보였다. 주어진 사회적 역할을 다 한 뒤에야 텃밭을 돌아볼 여유가 허락되는 도시농부에게 간혹 볼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해가 기울면 다시 와서 돌봐줄 생각을 했다. 해 질 녘 즈음에 다시 찾은 텃밭에는 이해 못 할 상황이 벌어졌다. 분명 한낮 동안에 죽은 듯 지쳐있던 배추가 파릇하게 잎을 세우고 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까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에 살짝 한기가 느껴지기까지 했다. 몇 번을 그런 날을 반복하고서야 뿌리가 무사마귀병에 손 쓰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음을 알았다.
진행된 상태를 알기 위해 결국 그동안 공들인 배추를 뽑아 들었다. 차마 글로 옮기기 어려운 뿌리 상태를 보고서야 지금까지 설명하기 어려웠던 배추의 상태가 이해되었다. 자연의 것이라 부르기 어려운 병든 뿌리를 보며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알지 못했던 도시농부의 부족함이랄까, 부끄러움이랄까 복잡한 감정이 느껴졌다. 앞선 봄부터 여름 동안 즐겁게 참여했던 텃밭 활동에서 얻은 자신감이 한여름 밤의 옅은 꿈처럼 흐려졌다. 무사마귀병은 한번 밭에서 발병하면 수년 동안 농부를 괴롭힌다는 소식이 더해지면서는 자신감으로 채워져 있던 마음 공간에 가시덤불 같은 걱정이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잘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과는 조금 색이 다르지만 비슷하게 무거운 감정이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에 계속 차였다.
가을 텃밭을 진지하게 관찰하며 사진으로 담고 있는 혜윰뜰 새싹 회원
손님으로 잠시 만나는 텃밭은 아름답다. 간혹 쓰러져 있는 작물이 있어도, 어느 게으른 농부의 작품이겠거니 하며 흘려 보면 그만이다. 매번 손을 맞대며 작물을 키우는 도시농부는 손님의 텃밭과는 다른 텃밭을 경험하게 된다. 정성을 다해도 뜻한 대로 되지 않는 날부터 텃밭의 아픈 내면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아픈 텃밭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은 마음 아프다. 특히, 노력해도 달라지지 않는 상황이 되었을 때 겪는 마음은 조금 깊은 감정이다. 그해 가을 농사는 이제 수확을 포기해야 한다는 결론에 스스로 다다를 즈음이면, 가을 오후 낙조에 물든 잎새 사이로 흘러드는 노을빛이 더할 수 없이 쓸쓸하게 아른거린다.
무언가 마음을 다해 가까이 다가선다는 것은 이런 일이다. 마음 다해서 아끼는 것을 내 바람대로의 모습으로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픈 일이다. 그래서 때로는 사랑하는 것일수록 가까이 보면 더 아프다.
그렇지만, 가까이 보아야 한다. 그 아픔을 감내하면서 고개 숙여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래야 작물의 아픔을 볼 수 있고 그것을 이겨내도록 도와줄 수 있다. 세상일도 아마 이렇지 않을까 싶다. 가까이 보면 덜 아름답고 더 아프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기에 가까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것이 그동안 혜윰뜰에서 내가 배운 도시농부로서의 마을 활동이고, 삶의 모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