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이후에 문득 이직하게 되었는데 운 좋게도 집 가까운 곳으로 일터를 옮겼다. 이직하고 처음에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겠다는 각오로 도보로 출퇴근할 생각을 했다. 걸어서 30분이 채 안 걸리는 거리라서 실천하기 어려운 목표도 아니고 아침 시간 짧은 공복 산책이 건강에 도움도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첫 한 주일은 새로운 곳에서 생활하는 긴장감에 피곤한 줄 모르고 도보로 출근을 했다. 햇살 가득해지는 아침, 밤사이 잠들어 있던 길을 나의 발걸음으로 깨우는 그 느낌도 좋았다. 그렇지만, 새로운 일터에서 하나둘씩 역할이 주어지기 시작하면서 퇴근 시각이 늦어지기 시작하면서 미처 전날의 피로함을 다 지우지 못한 아침이 반복되었다. 어느 날인가부터 아침 산책과 같은 출근을 포기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비 오는 것이 핑계였지만, 비 오지 않는 날에도 도보 출퇴근은 더는 하지 않게 되었다.
걸어서 출근이라는 결심을 멈춘 이유에는 피곤함 이외에 마을버스도 한 몫이 있었는데, 집을 나서면 1분 거리에 있는 정류장에서 종로 5번 마을버스를 타면 한 번에 회사 앞까지 데려다주는 유혹은 포기하기에는 너무 달콤한 것이었다. 게으른 성품 탓에 한자리에 자리 잡고 살아온 지 20년 가까운 시간이 되었지만, 눈앞에 보이는 마을버스를 타는 일은 그동안에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마을버스가 지나가면 지나가나보다 무심하게 바라본 시간만 십수 년이었다. 종로 5번 마을버스는 나와는 인연이 없는 다른 세상의 것이었는데, 이제는 매일 아침 기다리고, 허무하게 놓쳐서 다음을 기약하는 일이 없도록 아침 시작의 일상을 마을버스 오는 시각에 맞춰 생활하는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손에 든 휴대전화 속 세상 이야기를 들여다보거나, 게임을 하면서 이동하는 시간의 무료함을 채우곤 했는데, 일찍 눈에 세월이 찾아든 탓에 흔들리는 마을버스에서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기가 쉽지 않게 되었다. 그 덕분에 마을버스에서 창밖을 바라보게 되었는데 무심하게 스쳐 갈 때는 늘 같아 보였던 마을버스 밖 풍경도 관심 가지는 만큼 새로운 모습을 보여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때로는 마을에 관한 새로운 사실을 마을버스에서 배우기도 하는데, 어느 날인가 가을 코스모스가 한껏 꽃잎을 펼친 날 마을버스 앞자리에 앉은 두 분의 대화에서도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을에는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화려한데, 몇 년 전부터 아름다운 길이 소문이 나서 마을을 찾아오는 사람이 늘어나기도 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그 길은 온전히 자연이 준 선물로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핀 길이 아니었기에 우연히 날아온 씨앗이 아름답게 자리 잡은 것이라 짐작만 했다.
“지난 여름에 그렇게 날이 가물었는데 혼자서 물지게를 지고 올라가서 물을 주더라고요”
자연이 우연히 준 선물이라고만 여겼던 마을 코스모스의 아름다움은 지난 몇 해의 여름 동안 이름도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의 헌신 덕분이라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가을 코스모스가 한껏 피어난 날이면 잠시 그 길에 서서 꽃을 볼 수 있도록 해준 이에게 감사를 담은 말을 꽃에 속삭이는 습관이 생겼다. 마을버스가 준 고마운 습관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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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풀린 신발 끈을 스스로 밟고 넘어져서 크게 다친 경험이 있는 나는 걷기를 할 때 땅을 보고 걷는 습관이 있다. 크게 다침의 정도가 신발 끈을 밟으며 넘어지면서 얼굴을 심하게 다쳤다. 난생처음 병원에 실려 간 경험은 살아가면서 걷는 동안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렇다 보니 걷는 동안에는 주변 사물을 잘 못 보는 아쉬움이 있다. 고개를 들면 투명한 호수에 한 방울 물감을 떨군 듯한 푸른 하늘과 물가의 잔영처럼 반짝이는 구름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고, 사계절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크고 작은 색의 변화도 있지만, 그 모습을 살펴볼 여유가 걷는 나에게는 없다.
마을버스에 오른 나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하는 세상의 모습을 볼 자유를 만끽한다. 마을버스 길은 경사가 심한 곳도 있는데, 비 오는 날 천천히 경사를 오르내리는 버스에서는 주변 경관이 평소보다 조금 더 천천히 지나가서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즐거움도 있다. 버스에서 내리면 신발과 옷깃을 적실 비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을버스 안에 있는 그 순간만큼은 천천히 가는 마을버스를 만들어준 비에 감사한 마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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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도는 작은 마을버스를 타보았다면 알겠지만, 보통의 마을버스는 13~14석 정도의 좌석이 있다. 그중에서 두 좌석은 출입문 가까이에 있는데 출입문과 가장 가까운 곳의 자리는 보통 대중교통 이용 약자를 위한 배려석으로 남겨두는 좌석이다. 어느 날 저녁 늦은 퇴근길 보통의 날처럼 마을버스에 올랐다. 그날은 특히나 감당하기 벅찬 세상의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마지막 힘을 짜낸 하루를 보낸 기분이었다. 늦은 시각이라 마을버스에는 앉을 자리가 많이 남아 있었다. 잠시 주어진 휴식을 방해받고 싶지 않은 마음에 버스 끝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도로를 지나는 차량의 전조등에 끌려가는 밤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종점에서 탑승한 마을버스가 출발하고 정거장을 지날 때마다 탑승하는 사람들로 마을버스는 이내 만원 버스가 되었다. 그 안에서 자리가 없어서 곤란한 표정으로 버스 손잡이를 붙잡고 있는 한 어머님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자리마다 연로하신 승객이 앉아 있던 탓에 앉을 자리를 잡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뒷모습에서 어머니의 모습이 느껴져서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좌석에 앉아 있는 기력 있어 보이는 이가 나 혼자였던 이유도 있었다. 서 있던 분에게 뒷좌석으로 자리를 안내하고 나니, 곧이어 대중교통 이용 약자 배려석에 앉은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상관할 바 아니지만, 20대 중반쯤 보이는 그 승객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불편함이 역력한 기색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날따라 피곤함이 몰아쳤던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배려석에 앉은 승객에게 조금 미운 감정이 들었다. ‘내가 상관한 일은 아니지만’ 함께 사는 세상에서 우리가 모두 공유하고 있는 작은 상식이 깨지는 것 같은 기분에 못마땅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한두 번 더 눈이 마주쳤는데, 배려석 앉은 이에게서 미묘한 눈빛이 스쳤다. 처음에는 그 눈빛이 불쾌함이나 미안함 같은 감정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는 그 승객을 보고서는 혼자만의 큰 착각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내 눈에 ‘멀쩡해’ 보이던 그 승객은 한쪽 팔과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했다. 그날은 비 오는 날이라서 우산을 들고 있었는데 손에 쥐는 힘이 없는 탓인지 우산을 떨어뜨리고는 줍지 못했다. 힘이 남아 있는 한쪽 다리와 팔로 버스를 내리는 그 손에 우산을 쥐여주면서 미안한 마음을 담아 눈인사를 전했다. 그날 마을버스에서 상대를 배려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했던 이는 나 하나였다는 사실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아직도 세상을 바라보는 눈에 지혜가 충만하지 못한 나를 그날 나는 마을버스 배려석에서 민낯으로 만났다.
마을버스에서 인생을 새롭게, 다시 배운다. 걷기를 포기한 게으름의 결과치고는 행복한 선물을 받고 있다. 그래서 감사하다. 🍀
도시의 밤은 밝다. 밝다 못해 화려함에 있어서는 낮이 감히 견주기 어려울 정도다. 낮의 빛은 태양 햇살 하나이지만, 밤의 빛은 사람이 만들어 수 놓은 색이다. 그리고 애초 목적이 그러한 이유로 밤의 빛은 사람의 시선을 끄는 힘이 있다. 그 빛이 아름다운 것인지는 각자의 생각과 선택이겠지만, 이목을 이끄는 힘에 있어서 밤의 빛은 낮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어쩌면 태초부터 밤의 어둠이 몰고 오는 위협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의 노력은 승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밤의 현란한 빛이 나에게는 마음속 생각을 들어볼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 고난처럼 느껴지는 날도 있다. 모든 감각을 끄고 생각하나에 온전히 집중하는 시간을 사랑하는 입장에서 점점 더 현란해지는 도시의 밤길 산책에서는 위안을 찾기 어려워짐을 느낀다. 그렇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밤의 어둠이 가져오는 위험과 두려움을 가리기 위해서 밤의 화려함이 필요함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 보니 조금씩 시간을 들여 사색의 시간을 허락하는 나만의 산책길을 찾아가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사랑하는 길은 작은 시냇물이 흐르는 평탄한 계곡 길인데 다행히도 집 가까운 곳이라 늦은 시각 훌쩍 문을 나섰다가 피곤함이 발을 붙잡기 전에 돌아올 수 있어서 좋다.
마치 한밤의 산책을 즐기는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실상은 밤 어둠과 고요 속 작은 움직임이 가져오는 불안함이 마음 편한 것은 아니다. 한밤의 산책을 그리 자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이실직고해야겠다. 이처럼, 가끔 있는 일이지만 오늘 이야기는 밤의 산책에서 만난 밤 풍경에 관한 일이다.
어느 날, 마음속에 큰 질문을 얻었다. 그날 낮에 걸려온 전화 한 통으로 시작한 의문은 시간이 지나도 주변을 머물면서 커져만 갔다. 의문의 발단은 가볍게 생각했던 김장 나눔이었다. 마을에서 도시농부라는 또 하나의 이름을 가진 인연으로 마치 품앗이하듯 이웃과 함께 김장하고 나눔을 했다. 나눔을 하면서도 쉽게 말하면 개인정보를 알 수 없어서 어느 누가 김장 나눔 한 김치를 받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어딘가 필요한 분에게 잘 전해지기를 바랄 뿐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생각한 봉사였을 뿐, 벅찬 일상을 살아가면서 김장 나눔을 했다는 사실조차 흐릿하게 잊었는데, 그날 걸려온 전화 한 통, 그 너머의 한마디는 일상을 뒤흔드는 사건이 되었다.
“사람 먹을 것을 보내주어서 참 고맙습니다.”
전화기 너머 주고받은 어색한 인사와 덕담 뒤에 건너온 본심의 한마디는 사람 먹을 것을 보내주어 고맙다는 것이었다. ‘김치 보내줘서 잘 먹었다’라거나 ‘김치는 지겨우니 좀 다른 것도 생각해보면 좋겠다’ 정도가 처음 전화 받았을 때 떠오른 예상이었다. 예상에서 벗어난 것도 그렇지만, ‘사람 먹을 것’이라는 말을 할 때 수화기 너머 목소리에 묻어 나는 회한, 고마움, 조금은 슬픈 감정이 해일처럼 나에게 밀려들었다. 그 감정이 너무 세차서 호흡을 두세 번 가다듬는 동안 답을 할 수 없었다. 전화를 걸어오신 분에게도 내 작은 한숨이 전해졌는지 서로 얼마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호흡을 가다듬는데 손 끝이 아릿했다.
사람 먹을 것, 그 문장이 던진 질문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것이라 한동안은 조용히 마음속에 묻혀서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그렇지만 묻어둔 자리에서 의문은 사라지지 않았고 애써 가꾼 것도 아닌 자리에 피어나는 풀꽃처럼, 보이지 않는 작은 가시처럼 마음을 아릿하게 울리며 사라지지 않았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전화 주신 분이 그동안 받았을 김장김치도 누군가의 봉사와 땀과 애정의 결실이었을 것인데, 정작 받는 이에게는 그 정성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질문이고 아픈 가시였다. 이 의문은 곧 풀 수 있었는데, 봉사 행사로 열리는 김장 나눔은 수혜 대상 규모와 숫자가 정해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필요한 이웃 모두에게 공평하게 전해져야 하다 보니, 수에 맞춰 예산을 나누게 되면서 그리 맛난 김장김치를 만들 수는 없었던 것이다. 김장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배추 선택부터 절이고 씻는 물 같은 사소한 것까지 세심하고 정성스럽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사람 먹을 만한 것’을 만들기 어렵다. 한마디로 말하면, 내가 먹기 좋을 만큼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정성이 따르는 것이다.
그 뒤에 따라서 온 질문은 ‘답을 찾을 수 없다’는 답이 정해진 질문이었다. 해답은 간단하다. 누구에게라도 정성을 다해서 먹을 수 있는 것이 되도록 정성을 다하면 된다. 이 간단한 정답에는 수많은 오답이 숨어 있는데, 가장 큰 문제는 충분한 예산이 없다는 것이다. 정답은 알지만 실천할 수 없는 의문 앞에서 혼란스러웠다.
의문이 깊어진 어느 밤, 밤 산책 시간이 왔음을 느꼈다. 평소 생각해둔 밤길 코스를 걸어가서 작은 시냇물이 있는 마을 귀퉁이에 다다른 나는 그 자리에 앉아서 지난날 내린 초겨울 비가 모여 흘러내리는 시냇물 소리에 온전히 집중하면서 고요 속에 있었다. 한참을 시냇물 소리에 몰입하다 보니 어느덧 그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는 순간이 되었다. 고요 속에서 눈 뜨자 제일 처음 시야에 들어온 것은 시냇물에 비쳐 함께 흐르는 달그림자였다. 평소에는 그 자리에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는데, 주변이 어둠 속에 조용히 가라앉은 덕분에 달빛 하나만 온전히 빛나고 있었다.
‘달은 천 개의 강을 비춘다.’
나중에서야 월인천강지곡에서 유래한 말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날 밤 산책에서 시냇물의 달빛을 보고 처음 떠오른 문장이었다. 그제야 마음에 안식이 찾아왔다. 나의 역할은 달빛이 비치는 천 개의 강, 그중에서도 이 작은 시냇물을 비추는 달빛 한 조각과 같다는 것을. 세상의 모든 눈에 들어오는 강을 다 비출 수 없다고 이 작은 시냇물과 함께 흐르는 것까지 포기할 필요가 없다는 나만의 해답을 시냇물 속 달그림자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 뒤는 ‘안됩니다, 못합니다’라는 말을 참 많이 했다. 누군가가 이만큼의 예산으로 몇백 개의 김장 김치통을 채워보면 어떻겠냐고 하면 단박에 말한다. 못합니다. 안됩니다. 라고 말이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있었던 긴 이야기를 똑같이 해준다. 이 이야기를 듣고도 똑같은 요청을 하는 사람이라면 두 번 이야기 나눌 필요가 없었고, 할 수 있는 만큼이라도 하면 좋겠다고 이해해주면 그것으로 충분한 일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올해도 상대가 원하는 만큼 엄청난 양의 김장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참여하는 이웃 모두가 납득할 만큼의 맛 난 김장을 했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모두가 다해서 준비했다. 이유는 오직 하나다. 올해도 누군가에게 전해졌을 때 사람 먹을 수 있는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을 지키고 싶기 때문이다. 온 세상을 밝힐 수는 없지만, 시냇물 하나는 비출 수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누군가는 그 작은 빛 조각에 의지해서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 앞으로 나아갈지도 모르니, 멈추거나 포기하기보다 할 수 있는 만큼, 담을 수 있는 만큼 정성을 채우면 그것으로 되었다 싶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한 조각 빛은 더 밝아질 것을 믿는다.
함께 해주신 이웃에게 감사드립니다.
저에게는 여러분이 스승이고, 달 그림자이며 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