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4

사월 이야기

겨울을 지내면서 척박해진 황무지에 비라도 내리는 것은 사실 고마운 일이기는 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정말 필요할 때는 흔적도 보이지 않는 봄비이기에, 이른 봄, 가뭄이 황무지에 더해지면 모종으로서는 그 이상 힘든 위기가 없다. 척박하고 건조한 하루를 버텨내고 비틀어지려는 생명을 부둥켜안고 도시농부의 자애로운 손길을 기다려보지만, 그 기다리는 시간이 영원처럼 길다. 곧 꺼질 것 같은 순간 바쁜 일상을 마친 도시농부의 조심스러운 돌봄으로 간신히 생명을 부여잡고 다시 하루를 버텨낸다. 

사월 텃밭을 푸르게 채워가는 생명은 실상 하루하루 생명을 꺼뜨리는 수많은 도전과 시련 사이에서 생존과 그 너머 경계선을 오가는 사투를 벌이고 있다. 생명을 지키고 낮 동안 주어지는 빛을 양분 삼아 성장하는 것이 대견하면서도 문득 미안하기도 하다. 그렇게 어렵게 스스로를 지켜낸 텃밭의 작물은 어느 순간에는 수확이라는 시간을 맞이하니 말이다. 생명을 주고 심고 가꾼 것이 도시농부이니 거두는 자격 역시 도시농부에게 있는 것이 사람에게는 당연한 이치이지만, 그동안 수없이 텃밭을 다녀간 작물도 그 생각에 동의해줄지는 알기 어렵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면 작물을 바라보는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다. 세상 만물 모두 각자의 역할과 가치가 있음을 알지만, 텃밭에 자리 잡는 봄 작물에는 허락된 시간이 너무 짧은지도 모르겠다. 한 잎 한 잎을 뜯으며 봄 끝자락까지 살아낸 뒤에 가을 농사를 위해 뿌리째 뽑혀 사라질 운명을 혜윰뜰 텃밭의 작물은 담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바라는 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면 부디, 텃밭 봄 손님들이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는 것에서 만족과 보람을 가지고 갔으면 좋겠다. 그 푸르름을 가꾸고 나누는 사람들의 행복은 도시농부의 정성과 작물의 넉넉한 희생으로 가능한 일이니까. 

이쯤 되면 작품 <황무지>를 쓴 T.S. 엘리엇이 조금은 원망스럽다. 몰랐다면 보이지 않았을 4월 혜윰뜰 텃밭의 시린 아픔을 덕분에 알게 되었으니까. 그래도 어찌하랴, 지우고 비우고, 다시 채우기를 조금씩 반복하면서 성장통이라는 이름의 흔적을 가슴에 새기는 것이 삶의 본 모습인 것을. 아파하고 미안하기보다 성장의 흔적이 남긴 모습을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봄이라는 아름다운 시간을 함께한 작물에 감사한 마음이 그 흔적 사이사이에 남아 있기를 바라본다. ✿

우리의 이야기를 쓰겠어요

달리 생각해보면, 혜윰뜰 도시농업공동체 역시 변화무쌍한 자연 앞에서 공동체로서 생명력을 이어갈 방법을 찾아가고 있다. 이렇게 보면 텃밭을 가꾸는 사람이나, 텃밭에서 도시농부가 정성을 다해서 씨뿌리고 키우는 작물을 호시탐탐 노리는 작은 녀석들이나, 살아남기 위해서 애쓰는 것에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깟 작은 해충 녀석들과 사람을 비교하는 것을 불쾌하게 여기는 이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혹시 모르지 않는가? 텃밭 작물 아래 숨어 지내는 작은 녀석들도 지금 이 시각, 삼삼오오 모여서 올해는 어떻게 살아남고 누구네 텃밭의 작물을 야금야금 먹을 것인가를 상의하고 있을지도.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다 보면 앞날 뻔하게 지난 일 년을 반복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가오는 새봄에 새롭게 뿌리내리는 것은 작물만은 아니니까. 우리에게는, 새로운 봄에 이 고난의 과정을 미처 알지 못하고 용기 있게 참여하는 새내기 혜윰뜰 도시농업공동체 회원이 있다. 떠나는 이웃과 새롭게 함께 하는 회원의 흐름이 이어지면서, 초심을 찾고, 앞날의 어려움을 모를 때 얻을 수 있는 몽실몽실한 희망과 용기가 혜윰뜰에 피어난다. 그리고 어쩌면 초심자의 행운으로 자연이 주는 온갖 고난과 병충해를 피해서 원하는 수확에 이를 수도 있으니, 올해에도 기대를 내려놓지 않고 함께 가보려 한다.

문득 누군가 묻는다. 그 작은 텃밭에서 무어 그리도 할 이야기 있는지를.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주변 한 바퀴 거니는데 몇 분 채 걸리지 않는 작은 혜윰뜰 텃밭이다. 심어진 작물도 누군가에게 내세울 특별한 것이 없다. 매년 심는 상추, 배추, 무, 오이, 토마토이니 별로 새로울 것도 없다. 소문으로 들려오는 거대한 도시농업공동체나 텃밭처럼 매월 다채롭게 펼쳐지는 행사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씨 뿌리고 가꾸고 거두는 일상 속에 담긴 이야기가 있다.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뜻하지 않은 소식들이 있다. 

그 소식이 항상 행복하고 즐거운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라서 가끔 아쉽지만, 어려운 과정을 지나면서도 얻는 것도 분명히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된 것이지만, 텃밭 이야기는 텃밭 안에서 그치지 않는다. 수확한 작물이 머무는 공간, 전해지는 과정에도 수없이 많은 삶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기회가 주어지는 동안 우리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 먼 훗날 누군가 먼지 쌓인 책장을 열고 혜윰뜰이 도시농부로서, 이웃과 함께 하는 공동체로서 살아가기 위해 써 내려간 이야기를 기억해주기를 바라면서. 이것이 서투른 솜씨로나마 혜윰뜰에서 매월 편지를 보내는 이유 전부다.

겨울 온기

2021년 막바지 겨울에 41년 만의 최강 한파가 찾아왔다. 영하 15도를 넘나드는 기온에 모든 것이 얼어붙었지만, 도시농부 입장에서 한파가 마냥 나쁜 일만은 아니다. 겨울 온도가 낮으면 저온에서도 재배 가능한 겨울 잎채소 시금치, 봄동, 갓, 케일 등을 수확하는 농부에게는 고된 시련이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겨울을 나고 봄에 다시 얼굴 내미는 벼룩잎벌레 등을 줄이는 효과도 있어서 추운 겨울은 다음 해 농사를 위해서 한편으로는 필요한 과정이기도 하다.

도시농부는 농사와 협동, 가꿈과 나눔이라는 공동의 분명한 목표를 가진 모임이지만, 겨울 농사 활동이 없는 기간에는 서로 간 연락이 뜸해지면서 조금 무료한 겨울을 지내게 되기도 한다. 한 해 동안 농사일로 서로 걱정하고 위로하며 지내던 도시농부가 맞이하는 겨울 찬바람에는 그래서 남모를 허전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지난해 무료한 겨울을 보낸 혜윰뜰 도시농부의 이번 겨울은 조금 달랐다. 텃밭이나 실내에서 쉽게 키울 수 있는 허브, 방울토마토를 이용해서 허브 소금 만들기와 허브 식초 만들기 등을 함께 한 것이다.

함께 한다고 말은 했지만, 예년과 같이 추운 겨울 온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랑방에 삼삼오오 모여 정담을 나누는 풍경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웃을 위해 준비하고 나눔 하는 마음에 담긴 따뜻함은 우리가 예전에 느끼던 사랑방의 온기와 다르지 않다. 서로를 배려하는 따뜻함 뿐만 아니라 만들기 결과물이 일상에서 유용한 것들이라 이번에는 허브 소금, 허브 식초, 토마토 마리네이드 만들기 레시피를 공유해보고자 한다. 

● 허브 소금 만들기
재료: 히말라야 핑크소금, 로즈메리(육류용), 딜(생선용), 바질, 오레가노, 파슬리
만들기: ① 허브는 절구에 잘 빻아서 히말라야 핑크소금과 잘 섞는다. ② 만든 뒤에는 냉장고에 보관하면 좋다. ③ 허브의 양은 소금 간을 목적으로 할 때는 소금양의 10% 정도 넣고 풍미를 목적으로 할 때는 소금양의 20~25% 정도 넣는다. 이때 허브는 무게가 아닌 부피로 양을 조절한다.

● 허브식초 만들기(허브 생잎)
재료: 레몬, 식초, 식용 꽃, 애플민트, 설탕, 유리병, 종이컵
만들기: ① 빈 병은 깨끗하게 적당한 온수로 씻어 물기 없이 잘 말린다. ② 식용 꽃, 민트도 깨끗하게 씻어 물기 없이 말리고 레몬은 반으로 잘라 얇게 썰어 놓는다. ③ 식초 250mL, 설탕 250g을 혼합하여 설탕이 녹을 때까지 잘 저어준다. ④ 세척하여 말린 유리병에 민트, 식용 꽃, 레몬(얇게 자른 것으로 1/2) 순서로 넣는다. ⑤ 식초와 설탕 녹인 물(③)을 병에 가득 붓고 그늘진 곳에서 15일~20일 보관 후 탄산수에 희석하여 드시면 맛있는 음료수를 드실 수 있음.

● 코디얼 시럽 만들기
재료: 민트 2/3, 레몬 1/2, 설탕, 물
만들기: ① 설탕 1과 물 1 비율을 냄비에 넣고 설탕이 녹을 정도로 중불에서 끓인다. 이때 저으면 안 된다. ② 병에 민트, 레몬을 넣고 한 김 식힌 시럽을 붓는다. ③ 냉장고에 1주일 숙성

● 토마토 마리네이드
재료: 방울토마토 40개, 마늘 3~4쪽, 양파 1/4개, 올리브유 6Ts, 발사믹 식초 3Ts, 소금 2/3Ts, 설탕 1Ts, 레몬즙 1Ts, 바질잎 약간 ※Ts=밥숟가락
만들기: ① 방울토마토는 껍질을 벗겨서 사용 (토마토 껍질을 열십자로 칼집을 내어 끓는 물에 10초 정도 넣었다 찬물에 담가서 껍질을 벗기시면 됨) ② 바질은 굵게 채 썬다 (바질 없으면 안 넣어도 되고 바질 대신 셀러리나 깻잎도 가능) ③ 마늘, 양파는 다져서 준비된 재료와 토마토를 넣고 잘 버무려서 냉장고에서 하루 정도 숙성

레시피의 양은 취향에 따라서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각자에게 맞는 양은 조금씩 다를 수 있다. 제대로 된 맛을 보기 위해서는 약간의 기다림도 필요한데, 만들어 둔 허브식초를 이용하여 탄산수 허브식초를 맛보려는 성급한 마음에 일주일이 채 안 된 허브식초를 사용했더니 제대로 된 맛이 나지 않았다. 토마토 마리네이드는 고기 요리와 함께하면 상큼한 맛이 일품인데 이 또한 실제로 맛을 보니 하루 정도 적당히 숙성한 것이 훨씬 좋은 풍미를 보였다.

조금 숙성할 때 더 맛난 허브식초와 같이 사람 사이 관계도 숙성이 시간을 거칠 때 더 단단한 관계가 됨을 느끼곤 한다. 도시농부로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땅을 배우고, 병충해와 경합하는 일만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어려운 과정을 이겨나가는 방법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의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시간 앞에서 서로를 위로하는 용기도 알게 되었다. 마치 허브식초와 같이 혜윰뜰 역시 숙성의 시간을 지나며 더 아름다운 풍미로 채워지고 있다.

한겨울 혜윰뜰 나눔 이야기를 기억하며 글을 쓰는데, 라디오에서 Carpenters의 올드팝 <Close To You> 선율이 흐른다. 당신의 가까이에 함께 있기를 바란다는 노랫말이 혜윰뜰 겨울 활동과 많이 닮아 있다. 함께 하기 어려운 시기에도 우리는 새로운 방법으로 소통하고 서로의 온기를 담아 전하는 길을 찾아가고 있다. 새봄을 기다리는 서로의 마음을 매서운 한파에 지치지 않도록 보듬어 주는 혜윰뜰의 이 겨울 온기가 좋다.

당신의 바다

신년 새해를 맞이하며, 농한기 한가한 시기에 잠시 과거를 회상해본다. 혜윰뜰 경작기간 중 봄에는 상추, 고추, 가지를 가을에는 김장을 해서 나눔을 하곤 한다. 때로는 함께 요리를 해서 도시락 나눔을 하기도 하는데, 아는 후배에게서 어느 날 급한 연락이 왔다. 일손이 부족해서, 준비한 반찬을 담고 필요한 분들에게 보내드릴 시간을 맞출 수 없다는 연락이었다. 요리라면 모를까, 담는 정도면 할 수 있겠지라는 생각에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말했는데, 지나고 보니 쉽게 생각한 내 판단이 실수였는지 아니면 필연이었는지, 그도 아니면 무언가 이끌림이 있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막상 찾아간 그곳은 ‘반찬을 담는 일만’ 하면 되는 상황은 아니었다. 어떤 재료는 손질도 덜 끝났고, 볶음은 이제 막 간을 맞추고 있던 참이다. 주방은 좁고 그릇은 부족하다 보니 쌓여 있는 설거지를 하면서 조리하고, 끝나면 담고 식어서 김이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하나씩 포장을 해야 하는 일이 놓여 있었다. 그날, 파도치는 바닷가에서 망망대해 끝을 넘어 수평선 바라보는 기분이 들었던 것은 기억이 난다. 다행히 반찬 하나하나, 국 한 그릇마다 필요한 요리법이 기록으로 있어서 하나씩 손발을 맞춰 가면서 조리하기 시작했다.

냉방 시설도 없는 조리실에서 땀이 맺혀서 행여나 반찬에 떨어질까 싶어, 마치 어느 요릿집 나오는 영화에서처럼 이마에 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화구 앞에서 진미채를 볶기를 반복했다. 처음 해보기도 했지만, 진미채처럼 잘 타는 양념이 들어가는 반찬은 실제로 해보니 한 번에 많은 양을 하면 나 같은 초보로서는 제대로 해낼 방법이 없었기에 조금씩 양을 덜어서 조리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은 훌쩍 지나가고, 초보의 손 하나 더 보탠 것으로는 일이 줄어드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경험 없는 나와는 달리 다른 이들은 마치 초인처럼 일을 해치운 덕분에 적당한 시간에 조리를 마칠 수 있었다. 넉넉하지 않은 각자의 지갑을 열어서 준비하는 밥과 반찬이라 양이 넉넉할 리가 없다. 반찬 한 가닥이라도 흘려 못 쓰게 되면 누군가의 도시락에는 빈자리가 생길 것이기에 찬 하나하나 덜어 넣는 손길이 분주함 속에도 신중하고 진지해질 수밖에 없었다.

평소 주방에서 설거지하거나 라면 정도 끓여 내고 요리사인 양 의기양양 했던 정도가 요리 경험의 전부였던 나는 그날 그곳에서 주방일의 치열한 뜨거움을 맛볼 수 있었다. 볶음을 마치고 마지막 반찬 그릇을 닫은 뒤에야 정신이 돌아왔는데, 신고 있던 주방 장화 속에 물이 찰랑거릴 정도로 몸도 마음도 흠뻑 젖어있었다. 불 앞에 칼 들고 서 있던 긴장감이 물러서자 피로감이 밀려왔다. 주방에 잠시 서 있었던 것뿐인데, 몸은 단축 마라톤 뛴 누군가의 다른 몸처럼 무거웠다.

쉴 틈은 없다. 이제 각각 점심시간에 맞춰 배달해드려야 하는 일이 남은 것이다. 긴 거리는 차로 한 번에 이동했지만, 골목 골목을 다니는 것은 두 다리에 의지해야 하는 일이다. 계단길이나 오르막을 등짐에 도시락을 담고 올라가야 하는데 한 사람은 나르고 한 사람은 메고 올라가야 하다 보니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짊어질 몫이 적지 않다. 정확한 무게를 알 수 없었지만, 한 시간 배달을 마치고 내리막을 내려올 때는 다리가 뜻대로 지탱하지 못해서 잠시 쉬어야 할 정도였다.

조리실에서 땀에 절여지던 순간순간, 오르막을 오르던 가쁜 호흡 중에 잠시 혼란스러웠음을 인정해야겠다. ‘평생을 이렇게 도와드릴 수도 없을 텐데, 한 끼 드리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 건지’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확실히 생각나는 건 그런 생각이 부끄러워서 머릿속에서 재빨리 지웠다는 것이다.

일을 마치고 내려오는데 잠시 들를 곳이 있다는 것이다. 지칠 대로 지친 나는 먼저 가겠다고 했지만, 문득 언덕을 오르면서 했던 약속이 생각났다. ‘끝나면 꼭 들러’라고 누군가 하신 말씀에 정신이 쏙 빠져 있던 나는 마음에도 없는 말로 대답을 했는데, 그걸 후배가 들은 모양이다. 그것도 약속이라면 약속이기에 약속을 지키려 찾아갔다. 그렇게 만난 분이 ‘감나무 집 할머니’, 당신 스스로를 ‘김할매’라고 부르라던 분이다. 김 할머니도 아니고 김할매라니, 내 나이 두 배도 더 된 분을 그렇게 부르는 것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김할매라고 부를 때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고는 마음속 거부감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글에서도 생전의 부탁대로 김할매라고 부르려 한다.

김할매는 젊을 때 오랫동안 해녀로 활동을 했는데, 육지에서 만난 남편분에게 반해서 바다를 떠나 객지 생활해온 지 셀 수 없는 날이 지났다고 하셨다. 김할매가 그렇게 사랑하던 바다를 떠나게 만든 남편분은 정작 너무 일찍 자신의 곁을 떠났다고 했다. 나중에 들었지만, 김할매가 몸이 아플 때 병간호하면서 막일을 하다 사고가 있었다고 하는데, 가슴 아픈 이야기를 물을 수 없어서 소문으로 들은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다.

김할매 방에는 오래된 사진 한 장이 걸려 있었는데, 잠수복을 입은 김할매의 오래전 사진이었다. 원래 흑백사진인지, 색이 바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제법 파도가 이는 바다를 배경으로 웃고 있는 김할매의 젊은 날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날 파도가 높아서 바다 들어갈 준비를 다 했다가, 사랑하는 이가 너무 걱정해서 들어가지 않고 대신에 사진으로 남겼던 날이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사진을 다시 보자, 사진 속에 보이지는 않지만, 김할매의 표정에서 사랑하는 이를 마주 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김할매는 그 사진을 보면 그날 사진을 담아 주던 남편의 모습이 고스란히 생각난다고 했다.

그날 이후로 후배가 부탁하지 않아도 몇 번을 더 도시락 준비하는 날 함께 했다. 조리실의 처음 기억은 텁텁한 공기, 더운 열기, 반찬 냄새가 뒤섞인 혼란스러움과 늘 쫓기는 부산스러움이었지만, 어느 순간 그런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마음이 고요해졌다. 반찬을 담은 순간마다 김할매 생각이 났다. 환하게 맞이하는 주름진 얼굴 속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환대 덕분이었던 것 같다. 김할매 집에 걸려 있는 사진을 보면서, 수십 번 들어서 다 외우고 있는 이야기를 다시 할 때 일찍 떠난 남편을 행복하게 추억하는 김할매를 지켜보는 것이 좋았던 것 같다.

도시락 나눔일은 다음 해 김할매가 소천할 때까지 했다. 건강이 안 좋아진 날 무언가 직감하였는지 김할매는 언젠가 시간이 되면 바닷가에 가보고 싶다 했다. 나는 꼭 그렇게 해드리겠다고 대답했지만, 결국 그 약속을 지키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김할매도 알고 계셨으리라. 대답할 때 나의 진심을.

김할매는 결국 당신의 바다를 다시 찾아가셨을까? 그곳에서 사진 속 그 시간으로 돌아가서 그토록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남편분도 만나셨다면 좋겠다. 당신의 그 아름다운 바다에서 항상 행복하기를 새해 아침에 조용히 소망해 본다. 🍀

우리동네 텃밭송

우리동네 골목길 작고 작은 텃밭에 / 알록달록 채소들이 모여 살아요 / 작고 작은 씨앗을 고운 흙에 심으면 / 싹이나고 잎이나고 열매가 열려 / 파프리카 토마토 길쭉한 오이고추 / 쌈 싸 먹기 딱 좋은 상추 치커리 깻잎 / 시원한 레몬 타임 향긋한 로즈메리 / 영양소가 가득한 아욱 근대 머위 호박 – ‘우리동네 텃밭송’ 종로구 무악동 나무와열매 작은도서관 음악동아리 송글송글 노래공작소 作

혜윰뜰은 한양도성 성곽마을에 있는 도시농업공동체이다. 서울시에는 22곳 한양도성 성곽마을의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기 위한 지원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중에는 서울특별시청 문화본부 한양도성도감에서 지원하는 한양도성 성곽마을 공동체사업이라는 지원 프로그램도 있다. 저마다 색다른 한양도성 성곽마을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지역주민이 직접 실행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뜻깊은 지원사업으로, 올해 무악동에서는 일상을 기록하는 마을잡지와 함께 우리동네 노래지도 만들기 활동이 진행되었다.

우리동네 노래지도 만들기는 마을에 있는 나무와열매 작은도서관에서 ‘송글송글 노래공작소’라는 어린 학생들이 동아리 활동으로 실행한 것으로 말 그대로 우리동네의 모습을 담아 노래를 만들어 마을을 소개하고 알리는 활동이다. 동네 아이들이 마을 지도를 노래로 어떻게 그려나갔을까 궁금함에 알아보니, 돈의문 박물관 마을, 딜쿠샤, 무악재 하늘다리, 인왕의 봄과 같이 마을 안 유명한 명소를 빠짐없이 노래로 그려낸 것이 놀라웠다. 그리고 송글송글 노래공작소에서 마지막으로 그려낸 우리동네 노래 지도의 곡명은 ‘우리동네 텃밭송’이다.

그러고 보니 여름이 지나가던 시기에 작은도서관에서 아이들이 텃밭 견학을 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 아이들이 송글송글 노래공작소 동아리 회원으로 텃밭을 견학하고, 체험한 느낌을 있는 그대로 노래로 담아낸 것이 우리동네 텃밭송이다. 아이들의 눈으로 살펴보고 본 모습 그대로를 담아낸 노래가 첫 소절부터 마음에 와닿았다. 노래 중간에는 마치 녹음이 잠시 끊어지는 듯한 소리가 나기도 했지만, 동네 아이들 솜씨가 이 정도면 대단하다는 생각으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아이들의 작업물이 사소하고 가치 없어서가 아니라, 어른에게 주어진 책임과 무게가 있다 보니 더 많이 신경 써야 하는 일들을 고민하느라 노래 속 잡음은 가볍게 생각하고 넘어간 것이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올해 가을 농사 중 배추 농사가 뜻한 대로 되지 않았다. 가을 농사 소식을 접한 분이라면 알겠지만, 올해는 배추가 성장해야 할 시기에 날이 너무 따뜻하고 비가 잦았다. 달리 말하자면 이제 막 새잎이 나서 가장 여리고 약한 시기에 따뜻한 날을 벗 삼아 활개 치는 해충에게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는 의미다. 성장하기 좋은 날을 기다리는 배추 모종에 매일 쏟아붓는 비도 문제였다. 늘 젖어있는 토양 위에서 해충을 견디기에 올해 가을에 배추에 주어진 시련이 너무도 가혹했다. 결국, 무름병, 뿌리혹병, 벼룩잎벌레의 쉼 없는 공세에 배추를 심은 밭은 참혹한 결과를 맞이했다.

같은 기간에 뉴스를 들어보니 전문 농가에서 재배하는 양상추조차도 제대로 수확이 되지 않았다. 무름병이 와서 밭 전체를 못 쓰게 되다 보니, 패스트푸드 햄버거에 사용할 양상추가 없어서 넣지 못한다는 웃지 못할 소식까지 들려왔다. 한편으로는 생업으로 삼는 농부조차 농사가 어려운 해였는데, 작은 텃밭에서 하루하루가 새로운 경험인 도시농부에게 이번 가을이 보여준 가혹한 시련은 당연히 이겨낼 수 없었던 일이라 스스로 위로를 했다. 마음으로는 농사가 잘되지 않은 이유를 찾아서 서로 위로했지만, 한해 농사의 마무리가 뜻한 대로 되지 않아 속상한 마음은 감추기 어려웠다.

달리 생각하면 피하지 못할 시련도 아니었다. 이미 지난해 뿌리혹병을 경험했고, 가을 농사 전에 제대로 토양을 정비할 기회가 없었기에 배추 농사 연작을 피하고, 이번 해는 토양을 쉬게 하면서 보리와 같은 녹비작물을 심어 땅의 힘을 회복할 시간을 주었다면 아마도 올해 큰 수확은 어려웠겠지만, 다음 해를 기약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의 바람이란 끝이 없기에, 땅을 쉬게 하기보다 병해에 저항성을 가진 품종과 농부의 부지런함으로 자연의 섭리에 맞서보려 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말한다면 계획대로 되는 계획이란 세상에 없다는 단순한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세상에 계획대로 되는 일이란 없다는 생각을 하던 중에, 그제야 우리동네 텃밭송 노래에서 들리던 사소한 잡음에 마음이 쓰이기 시작했다. 아이들과 함께 노래를 만든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올해 아이들과 함께 노래를 만드는 일이 여간 고된 작업이 아니었다고 한다. 우리동네 텃밭송은 일종의 합창곡인데, 이 말은 어른의 언어로 풀어서 본다면, 백신도 맞지 못한 아이들이 방역수칙을 지키며 노래를 함께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도 가사를 고치고 다시 노래를 맞춰보는 과정들이 필요하기에 한 두 번의 만남으로는 어려운 일이라, 이 시대에 노래를 만든다는 것은 그 수준이 어떤가에 관계없이 고된 작업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노래 속 잡음은 잡음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계획대로 되는 계획은 세상에 없다는 진리는 송글송글 노래공작소에서도 확인되었는데, 우리동네 텃밭송의 주요한 부분을 맡은 아이에게 마침 변성기가 온 것이다.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하느라 변성기라고 피하기보다는 원래의 계획대로 노래를 부른 것 같은데, 아이가 겪고 있는 변성기가 고스란히 노래 속에 담겨 있었고 나는 그것을 녹음과정의 실수로 들은 것이다. 아마도 변성기를 맞이한 아이의 목소리를 지켜주기 위해서 무리해서 다시 녹음하는 어른의 욕심은 부리지 않은 모양이다. 사연을 알고 나니 노래가 색다르게 다가왔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담았다는 사실과 어려운 시기에 변성기까지 맞이하면서도 자신의 역할을 피하지 않은 아이의 마음이 동시에 느껴졌다. 

우리동네 텃밭송을 들으며 이름 모를 위안과 안도감이 찾아왔다. 혜윰뜰 도시농업공동체가 여러 해 동안 활동을 이어오면서 이제는 조금 더 경력 있는 도시농부의 결과물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이 사실이다. 농사를 못 하면 도시농업공동체 활동의 가치가 작아진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그런데, 송글송글 노래공작소의 우리동네 텃밭송은, 마을활동의 가치란 참여와 노력의 과정으로 충분한 일이지, 결과가 모든 가치를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롭게 알려주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에 다다랐다고 해도, 과정의 노력이 충분하고 한 해 동안 함께 고민하고 도전해온 노력이면 충분한 일이라는 것을 송글송글 노래공작소의 꼬마 이웃들은 보여주었다. 자만심 가득한 다 큰 도시농부가 동네 꼬마 음악가들에게 제대로 한 대 맞고 정신이 들었다. 혜윰뜰은 올해 도시농부의 최선을 다했고 확실히 실패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우리의 노래를 끝까지 부르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기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