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집 혜윰뜰의 잘 자란 상추
봄에 정식한 작물이 햇살을 머금고 쑥쑥 자라는 이맘때쯤이면, 혜윰뜰은 말 그대로 맛집으로 영업을 시작한다. 텃밭에서 갓 수확한 상추는 냉장고에 보름을 넣어두고 먹어도 그 맛과 식감이 변함없고, 이제 막 조금씩 수확을 시작하는 아삭이고추, 토마토는 싱그럽다 못해 눈부신 아름다움을 뽐낸다. 자연이 주는 싱싱함으로 무장한 혜윰뜰 맛집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채소는 마트에서 사서 먹기만 하다 혜윰뜰 텃밭에서 상추나 토마토를 수확해서 맛보기 시작하면서 새롭게 알게 되는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식물의 강한 생명력이다. 마트에서 사 온 상추를 냉장고에 잘 모셔 두었다가 깜빡하고 며칠 지난 뒤에 맛보려 꺼내 보면 어느새 많이 연약해진 모습에 아쉬울 때가 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몇 번 그런 일을 겪고 나면 식물이란 참 연약한 존재라고 느끼게 된다. 평생을 마트 채소에 익숙한 삶을 살아왔기에 상추의 연약함은 어느덧 나에게는 당연한 상식이 되어 있었다.
그 당연한 사실이 혜윰뜰 텃밭을 경험하면서 변화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인가 이웃분이 많이 수확했다고 상추 한 꾸러미를 안겨 주셨는데, 평소 채소를 많이 먹지 않던 나는 이 많은 상추를 언제 다 먹을까 염려될 정도였다. 상추는 오래 보관하면 안 되는 채소라는 나의 상식도 염려하는 마음에 불을 질렀다. 그렇게 받아온 상추를 그날 쌈 재료와 함께 실컷 먹고 남은 것을 냉장고에 넣어두고는 한참을 잊었다. 일주일보다는 더 긴 시간이 지난 뒤에 검은 봉투에 든 ‘그것’을 발견하고는 머릿속에서는 온갖 상상이 펼쳐진다. 시들시들하고 소금에 절인 듯 휘늘어진 상추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조심스럽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봉투를 열어 본다.
‘내가 착각한 것일까?’
봉투 안 상추가 오늘 사 온 것처럼 싱싱하다. 시간이 오래 지났으니 착각할 만도 하다는 생각을 스스로 하면서, 아내에게 상추 언제 새로 사 왔는지를 물어본다. 새로 사 온 것이 아니란다. 일주일도 더 전에 텃밭에서 수확하여 나눔 받아온 그것이 맞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다시 한번 상추 봉지를 열어본다. 저쪽 어딘가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서 시들어 있는 상추를 솎아낼 심산이다. 한참을 뒤져보았지만, 그런 것은 보이지 않는다. 어찌 된 것일까?
수십 년을 다져진 마트 채소에 대한 경험과 기억이 산산이 깨어지는 순간이다. 상추란 원래 이렇게 긴 생명력을 가진 것이었다는 새로운 사실에 놀라면서도, 어떤 조건과 상황이 맞아서 우연히 벌어진 운 좋은 사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동안 쌓여왔던 고정관념이 요동치는 것을 스스로 잠재워 본다. 비슷한 경험을 몇 번이고 반복한 뒤에야 그동안 내가 다져온 채소에 대한 고정관념이 말 그대로 잘못된 판단이었음을 시인하게 된다. 그 뒤에도 여러 번 상추 나눔을 받아 보았지만, 시들어 실망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도자기로 만든 혜윰뜰 가족회원 텃밭 푯말
흔히들 말하기를 요리의 생명은 신선한 재료에 있다고 하지 않는가. 채소도 마찬가지다. 푸르고 탄탄한 생명력으로 꽉 찬 채소는 그 생명력 자체로 훌륭한 맛이 된다. 아삭거리는 식감, 혀를 맴도는 탄력, 목 넘기는 순간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촉촉함까지. 상추 하나가 완벽하게 조화로운 공연을 끝내고 무대를 내려가면 나는 그 맛을 잠시 동안 음미하면서 행복감에 빠져든다. 맛집 혜윰뜰을 제대로 즐기는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맛집 혜윰뜰을 발견한 행복감에 도시농부의 마음에는 평화로움이 가득해진다.
그렇지만, 이런 행복감에는 늘 시샘이 뒤따르는 법인지, 맛집 혜윰뜰을 나보다 더 일찍 발견하고 탐닉하는 녀석들이 있다. 도시농부는 해충이라 부르는 그 곤충들은 맛집 혜윰뜰의 진가를 일찍부터 잘 알고 있는 녀석들이다. 그들은 어찌나 성급한지, 키우느라 애쓰고 있는 도시농부의 허락도 받지 않고, 텃밭 현장에서 수확이라는 과정 없이 진수성찬을 차려 놓고 자기들끼리 잔치를 벌이곤 한다.
친환경적인 볏짚 바닥 덮기를 한 혜윰뜰 회원 텃밭
맛집 혜윰뜰의 반갑지 않은 잔치
봄과 여름을 거쳐서 만나게 되는 맛집 혜윰뜰 탐방객은 주로 진딧물, 배추좀나방, 굴파리 애벌레와 같은 작디작은 녀석들이다. 어찌 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혜윰뜰은 가능하면 자연 그대로 농사를 지어서 가족이 함께 먹는 텃밭이기에 사람에게 해로운 것은 잘 사용하지 않는다. 자연히 해충에게도 안전한 맛집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자연과 사람이 반반씩 나누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다가도, 정성을 다해서 키운 작물의 어린 새순이 해충의 맛집 잔치로 노랗게 시들어가는 모습을 보면 속상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봄을 지나는 동안 잠시 한눈을 팔다 보면 햇살이 뜨거워지는 시기에는 손쓰기 어려울 만큼 해충 맛집 잔치가 도시농부 눈 앞에 펼쳐진다.
이런 경험을 한두 번 하다 보면, 맛집 혜윰뜰을 온전히 사람의 것으로 지키내기 위한 도시농부의 뜨거운 투쟁이 시작된다. 진딧물이 처음 보이는 시기에는 손수 만든 친환경 비법을 뿌려준다. 아직 번짐이 많이 시작되지 않은 시기에는 흔히 사용하는 물티슈 몇 장으로 진딧물이 보이는 곳을 깨끗이 닦아주는 것만으로도 효과를 보기도 한다. 여름이 오기 전에 부지런히 잎을 정리해주고, 닦아주다 보면 가끔은 선물 같은 여름의 수확을 맛보는 기쁨이 부지런한 도시농부에게 주어진다.
해충이라곤 해도 생명을 가진 녀석들이라, 서로 힘을 모아 공생하는 기특함도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진딧물과 개미의 관계가 그렇다. 텃밭 일을 잘 아는 분의 표현을 빌린다면 개미가 많아지면 진딧물을 주의하라고 한다. 진딧물이 내뿜는 감로는 개미에게는 좋은 양식이 된다. 진딧물과 개미는 감로를 통해서 이른바 영양적 공생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좋은 감로를 지키기 위해서 개미도 필사적인지라, 진딧물에게 천적이 되는 다른 곤충의 침입을 막아준다.
서로 주고받으면서 지켜주는 모습이 기특하다가도 시든 새순을 보면, 마음 굳게 먹고 진딧물과 개미를 티슈로 닦아내고 친환경 비법으로 쫓아내는 일을 반복한다. 해충이 발생하면 사람도 서로 협력하게 된다. 한 곳에서 쫓아내도 다른 곳에 피했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하기에, 해충이라는 고난이 닥치면 사람도 협력의 방식을 배우게 된다. 이쯤 되면 사람이 자연을 닮은 것인지, 사람도 자연의 일부라 애초에 자연의 법칙을 그대로 따르게 되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해충이라는 고난이 도시농부에게 늘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함께 걱정하고 협력하는 법을 배우는 기쁨이 맛집 혜윰뜰에는 고난 뒤에 찾아온다.
혜윰뜰 텃밭에서 한그루 작은 나무 같은 자태를 뽐내는 바질
그러니, 맛집 혜윰뜰을 찾아 문전성시를 이루는 해충들의 잔치가 있다고 한들 어떠하랴. 그 고난이 있기에 추억도, 기억도, 함께 웃고 우는 삶의 이야기도 펼쳐지는 것을. 어쩌면 고난은 우리 삶을 진하게 다독여 주는 양념과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혜윰뜰 텃밭에서 느끼는 고난의 그림자 뒤편에는 다음 계절의 행복이 싹트고 있을 것을 알기에 오늘의 고난도 즐겁게 맞이해 본다. 🍀
겨울을 이겨낸 달래에는 향긋한 봄기운이 가득하다
혜윰뜰의 봄 농사가 시작되고 모종을 나누는 날이라, 오랜만에 텃밭을 찾았는데 뜻하지 않게 달래를 한 움큼이나 얻었다. 겨우내 심어 놓은 달래가 잎도 여리고 가느다란 것이 어찌 그 겨울을 살아남았는지 모르지만, 달래다운 향긋함을 뽐내고 있었다. 잘 챙겨가서 꼭 맛있게 무언가 해 먹으라는 이웃 농부의 말에 조심스레 가지고 집으로 왔다.
달래는 참 쓰임새 많은 작물이다. 그대로 씻어서 송송 채를 썰어 양념장에 넣은 달래 장은 따뜻한 밥에 비벼 먹으면 감칠맛 넘치는 한 끼를 맛볼 수 있다. 향긋함을 그대로 살려서 달래 전을 해도 좋고 무침도 좋다. 특히 달래 무침은 잘 구워 기름기 빠진 삼겹살에 곁들여 먹으면 고기 요리의 느끼함을 잡아주는 특별한 비법 재료가 된다.
군침 넘어가는 생각은 많았지만 가장 무난한 달래 된장찌개를 끓였다. 달래 된장찌개를 끓일 때는 달래를 가장 마지막에 넣어주면 좋은데, 그렇게 하면 특유의 풍미와 향이 날아가지 않고 식탁에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잘 끓여 내온 달래 된장찌개가 한창 무르익은 봄의 맛으로 식탁을 가득 채운다. 달래 특유의 조금은 알싸한 맛에서, 온 겨울을 이겨낸 저력이 느껴지기도 한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나에게 있어서 봄 농사는 가을 농사와 비교하면 조금은 마음에 여유가 있다. 덜 힘들어서 그렇다. 봄이라고 병충해 없는 것이 아니고, 손 가는 일이 적은 것은 아니지만, 가을 텃밭에 비할 바는 아니다. 혜윰뜰에는 가끔 벼룩잎벌레가 생기는데 이 녀석들이 봄 작물인 상추, 가지, 토마토, 고추와는 친하지 않아서 피해도 별로 생기지 않는 이유도 있다. 고추는 탄저병이라는 무서운 복병이 있지만, 혜윰뜰에서는 고추가 차고 습한 바람에 병들기 전에 수확을 마치는 터라, 봄 농사에는 작은 여유로움이 있다.
봄 농사가 즐거운 것은 또 다른 이유도 있다. 겨울이라는 기다림의 시간을 지나고 만나는 첫 번째 도시농부 활동이기 때문이다. 달래가 겨울 동안 추위 속에서 더 향긋해진 것처럼 도시농부도 겨울이라는 시간 동안 기다림을 통해서 농부의 에너지를 채우게 된다. 그러니 여러모로 봄 농사는 도시농부에게는 행복한 시간이다. 씨 뿌려 애써 키운 열무잎 사이를 톡톡 뛰어다니는 벼룩잎벌레를 쫓아다니면서도 힘든 줄 모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유로움과 기다림 끝에 만나는 행복한 시간에 더해서 혜윰뜰의 봄 농사를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새로운 이웃의 참여다. 혜윰뜰은 천 세대 가까운 이웃 중에서 신청을 받아서 텃밭을 가꾸고 있는데, 매년 새봄이 오면 새롭게 참여할 이웃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밭을 내어주는 이웃이 나온다. 그 밭에는 새봄에 새로운 도시농부가 함께하게 되는데 여느 마을공동체 활동이 그렇듯이 혜윰뜰 도시농업공동체에도 새로운 도시농부, 새 이웃은 공동체를 살아 숨 쉬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호기심 넘치는 새내기 도시농부의 눈빛에 텃밭 구석구석이 밝아지고 활기가 찾아온다.
새로운 회원이 참여하면 가장 먼저 전하는 말이 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 편하게 이야기를 해달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 같은 만년 초보 농부가 새로운 회원이 품은 도시농업에 관한 궁금증을 풀어줄 리는 만무하다. 대부분 질문은 나 역시도 알지 못하는 것들일 때가 많다. 특히나 시시각각 자연의 선택에 따라 변화하는 텃밭은 가끔 밭일을 돌보는 나에게는 늘 어려운 과제이다. 그러다 보니 신입회원의 호기심 어린 질문에 가장 많이 하는 답은 이렇다.
“사실 저도 잘 모릅니다”
이렇다 보니, 도시농업공동체 대표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무지함을 그대로 드러내야 할 때가 많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혜윰뜰 회원도 대표라는 자에게 도시농업에 대해 의지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부끄러움이 덜해졌지만, 활동 초반에는 모르는 일을 솔직하게 모른다고 말해야 할 때, 목에 그 말이 턱하고 걸려서 쉽게 꺼내기 어려울 때도 있었다. 이제는 수년 차 경험이 쌓인 선배 도시농부들이 있기에, 내가 질문받는 일은 거의 없어서 참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혜윰뜰은 원래 마을에 있는 작은도서관의 이름이다. 그 이름을 부르다 보니 정감 어리고 특별해져서 도시농부의 활동도 같은 이름으로 삼게 되었다. 도시농업 이전에 혜윰뜰 작은도서관에서 더 먼저 태어난 주민공동체가 있는데, (희한하고 느슨한) 독서모임 책수다라고 한다. 책을 통한 인문학 평생학습 동아리라고 하면 조금 거창하지만, 책 이야기 속에서 삶의 길을 찾아가는 이웃들이 함께하는 모임이다. 달래를 한 움큼 건네준 회원도 책수다에서 먼저 인사를 나눈 이웃이다. 함께 책을 읽던 인연이 이어져서 텃밭에서도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참 우연하게도 달래를 얻은 다음 날, 또 다른 책수다 회원에게 바지락을 조금 얻었다. 고향에서 올라온 바지락을 잘 해감하고 하나씩 까서 정성스럽게 냉동해서 독서모임 회원과 나눔 한 것인데, 염치없이 나도 한 덩이를 얻었다. 아까워서 다 먹지 못하고 모셔두었던 달래가 생각나서 이번에는 바지락 달래 된장찌개를 끓였다. 역시나 그 맛이 기막히다. 원래 향긋했던 달래 된장찌개에 바지락의 바다내음 더한 짭조름한 감칠맛이 더해지니 어제 맛보았던 그 찌개와는 비교할 수 없는 행복함이 있다.
바지락 조금 더했을 뿐인데 이렇게나 맛이 달라지다니! 감탄하다 문득 그 특별한 맛의 이유가 느껴졌다. 사실 텃밭에서 나는 작물은 가까운 마트에 가면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다. 달래는 사시사철 맛볼 수 있고 바지락 역시 그렇다. 그런데 마트에서 사 온 재료로 요리를 하면 이렇게 특별한 맛이 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달래는 품종도 거의 변화가 없어서 맛이 다를 리 없는데 말이다. 왜 그럴까 생각하다 문득 알게 된다. 이웃과 나눔을 통해서 얻은 달래에는 우리만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것을.
바지락도 그렇다. 즐겁게 먹어줄 이웃을 생각하며 해감하고 껍질을 제거해서 먹기 좋게 냉동해서 건네준 것에는 그것만의 정성과 애정이 깃들어 있다. 요리하면서도 그 마음이 좋아서 식탁을 준비하는 시간이 즐거워진다. 누군가의 배려와 정성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다는 것에서 행복과 안도감이 찾아온다.
혜윰뜰 텃밭과 작은도서관에서 나눔 받은 달래와 바지락이 만나서, 내 솜씨로는 낼 수 없는 깊은 맛, 즐거운 맛의 요리가 완성되는 경험을 하면서 또 다른 상상을 해본다. 서로 다른 마을공동체가 어울려 함께 할 수 있을 때, 만나게 될 새롭고 깊은 경험은 어떤 느낌일까. 마을에서 바지락 달래 된장찌개의 그것과도 같은 향긋하고 감칠맛 가득한 봄소식이 가득해지지 않을까.
그래서 오늘도 나는 이웃에게 이야기한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마음 편히 이야기해달라고. 비록 그것이 앞 못 보는 이 둘이서 밤길을 걷는 일이 된다 해도 덜 외로운 길이 될 테니까. 서로의 정성과 배려가 마주하며 싹트는 혜윰뜰 텃밭의 작은 행복이 언제까지나 함께 하기를 희망하며. 🍀
서울특별시의회 30초 영화제 혜윰뜰 응모작의 한 컷
해마다 이맘때면 텃밭에 오를 때마다 생각나는 한 사람이 있다. 오랜 시간을 알아 온 것은 아니지만 마음속 깊이 울림을 남겨준 사람이기에 어쩌면 평생을 기억하게 될 사람이지 않을까 싶다. 그분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감히 그분을 벗이라 부르려 한다.
지난해 말에 혜윰뜰이 영화제에 참가했다. 도시농부 활동이 3년차 정도 되다 보니, 처음 도시농업을 시작하던 날의 기억이 흐릿해지는 것이 아쉬워 짧은 기록 영상을 만들고 있었는데, 때마침 서울특별시의회에서 영화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다. 텃밭에서 밭일하다 영화제라니. 애초에 수상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않았고, 혜윰뜰 이야기를 기억해주는 이가 세상에 누구 하나라도 있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으로 영화제에 응모했다. 애초에 영상 제작일에 많은 경험이 없다 보니 별다른 도구도 없어서, 영화제 참여하면서 휴대전화 카메라 하나에 의지해야 했다.
서울특별시의회 30초 영화제에 응모한 작품은 ‘마을공동체 지원 조례가 찾아준 특별한 기적’이라 정했다. 제목을 정하는 것에 큰 고민은 없었는데, 평소 텃밭에 오를 때마다 떠올려 보았던 지난 과정을 생각할 때 혜윰뜰의 시작을 ‘기적’이라는 표현 이외에 달리 담아낼 길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상 제작도 짧은 시간에 이루어졌다. 혜윰뜰에서 활동하는 이웃의 일상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이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라는 생각에 여과 없이 담아내려 노력했던 기억이다.
2019년 5월에서야 제대로 된 텃밭 활동을 시작한 혜윰뜰이지만, 준비의 과정은 길었다. 땅을 정돈하고 농사지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시간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긴 시간의 흐름에 의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의 이야기는 혜윰뜰에서 온 편지를 처음 시작할 때 거의 다 이야기를 했으니 여기서 다시 꺼내지는 않으려 한다. 영화제 출품 영상에는 이 과정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려냈다.
영화제 출품을 위해 혜윰뜰 이웃의 일상을 인터뷰로 담다 보니 한가지 새롭게 보이는 것이 있었다. 정말 흙 만지는 것을 좋아하고 텃밭 활동 시간을 행복하게 여기는 이웃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는 매우 게으른 사람이다. 농부가 되었다고 게으른 본성이 달라지지는 않았기에, 텃밭 작물 돌보고 가꾸는 일을 남들처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처음 텃밭 활동을 계획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혜윰뜰 공동체 대표를 맡고 있지만, 농부로서는 여전히 낙제 수준이다. 이웃이 함께하고 그 안에서 이웃이 소통하는 힘이 성장하는 일에 보람이 있지만, 땅과 그리 친한 사람이 아니라서 농사가 늘 어색하고 힘든 여정이라고 느끼는 날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도시농부 활동이 보람은 있지만, 마냥 행복한 일만은 아니었다. 나에게 도시농부란 도전하고 극복해야 하는 하나의 과제였다. 그러다 보니 이웃도 비슷한 생각일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지내왔다. 이런 나의 무지한 생각이 영화제 출품을 위한 이웃과의 인터뷰에서 무척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씨 뿌리며 새싹을 보살피고 수확하는 경험에서 살아 있음을 느껴요’
인터뷰 중 텃밭 활동의 의미를 묻는 말에 짧게 답한 이웃의 이야기, 어디선가 들어본 말이었다. 몇 년 전 혜윰뜰 텃밭이 폐허의 공터였던 시절 이곳을 되살리기 위해서 함께 힘을 더했던 그분의 말과 같았다. 그동안 어떤 이야기에서도 꺼내 본 일이 없지만, 혜윰뜰이 오늘의 모습을 갖추는 데 큰 역할을 해준 분이 그 당시 무악현대아파트 생활지원센터장이었던 조지현 센터장이다. 중요하지만 실행하기 어려운 단지 내 큰 업무를 척척 해낸 터라 혜윰뜰 텃밭을 되살리는 일도 업무 분담을 하여 진행하게 되었다. 나는 민원이 있는 점유 주민과의 일을 해결하고 행정에 어떤 방법으로 도움을 구할 수 있을지를 알아보았고, 그 외 실무적인 대부분의 일은 그분의 몫이었다.
평소 하다가 안 되면 한만큼으로 만족하다는 신조를 지니고 있던 나였기에, 혜윰뜰 텃밭을 회복하겠다는 약속이 벽에 부딪혔을 때마다 ‘안 되는 일이면 할 수 없지’라는 생각으로 내려놓기를 반복했던 나와는 달리, 센터장은 서로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고난 속에서 헌신했다. 어느 날인가 약속한 일의 진행 경과와 안부를 묻는데, 일은 난관에 봉착해있고 고민하다가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지 마세요’
나는 평소 내 신조대로 조언을 드렸지만, 그분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이 공간이 목적한 것처럼 제대로 복원되고 난 뒤 이곳을 함께 이용할 이웃들이 느낄 행복과 보람을 생각하면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그 의지에 담긴 뜻이 잘 와닿지 않았다.
영화제 출품을 위한 이웃과의 인터뷰에서 이야기를 들으며, 예전 센터장의 혜안에 고개가 숙여졌다. 어쩌다 운 좋게 성과가 나면 좋고 아니면 말자는 가벼운 생각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뒤에서 진심으로 이웃의 행복을 위해 노력한 한 사람의 희생이 있었음을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너무 무리했던 탓일까. 센터장은 혜윰뜰 텃밭이 완성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병 치료를 위해서 퇴임했다. 반년 넘는 투병 끝에 다행스럽게도 치료를 끝내고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 일처럼 기뻤지만, 차마 예전처럼 같이 일하자는 부탁을 할 수 없었다. 조금 여유있는 단지에서 즐겁게 일하고 있다는 이야기에 진심으로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인사로 간절한 마음을 대신했다.
세상 사람 눈으로 보면 입주자대표회장과 관리사무소장으로 만난 사이일 뿐이겠지만, 난관 앞에서 같은 뜻과 마음으로 어려움을 헤쳐나간 우리는 말 그대로 동지였다. 서로가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 지켜주려 한 고마운 인연이었다. 그 아름다운 벗에서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리운 벗이여, 그대가 있었기에 혜윰뜰의 오늘이 있음을 기억합니다. 어두웠던 날 등불이 되기 위해 견뎌준 시간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기억을 간직하는 한 혜윰뜰은 우리 모두의 늘 푸른 공간으로 남아 있을 것을 진심으로 믿습니다.”
나는 아직도 다시 만날 어느 날을 기다리고 있다. 당신의 정성과 노력이 깃들어 있는 5월의 파릇한 혜윰뜰 텃밭에서. 🍀
봄맞이하는 모종에는 새봄 생생한 기운이 가득하다
새봄이 아름다운 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이 그 안에 담겨 있기 때문일까. 도시에서 살면서 4월의 생기와 싱그러움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살았는데, 도시농부가 된 이후에는 새롭게 만나는 4월이 가져다주는 의미가 매번 새롭다. 희망과 기대, 걱정과 소망이 섞인 다채로운 감각이 아직은 차가운 4월의 봄바람에 소복이 묻어 있다.
차갑고 딱딱한 땅을 비집고 힘겹게 싹트는 새싹을 보면 때로는 애처롭다. 아직은 서늘한 바람이 새싹을 날카롭게 흔드는 모습을 보면 야속한 마음마저 든다. 처음 도시농부 생활을 시작할 때 추억거리 하나가 생각난다. 마르고 차가운 땅 위에서 힘없이 지쳐 잎을 모두 늘어뜨린 작물을 보면서 다 틀렸구나 싶은 경험이 있었다. 아직 봄기운이 제대로 시작하지도 않았던 날, 말 그대로 힘없이 다 죽어가는 작물을 보고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농부의 정성이 부족한 것이었을까? 아니야, 모종이 처음부터 약했던 거야’
시든 작물을 보면서 갖가지 상념에 빠진 채 우두커니 바라보고만 있다가 문득 정신이 들어 서둘러 정성스럽게 물을 주고, 옆으로 쓰러진 작물은 일으켜 세워보기도 한다. 자연의 힘을 믿어보면서 내일이면 아무렇지 않게 다시 생생함을 되찾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애써 자신을 위로해본다.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나 아닌 다른 누군가의 탓으로 작물이 이 지경이 되었는지를 고민하면서.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다시 찾아간 텃밭에는 변화가 없다. 분명히 새봄인데, 만물이 소생한다는 그 봄이 맞는데. 날은 갈수록 따뜻해지고 어제와 다른 바람은 오늘 따뜻하게 살랑 불어주는 미풍임에도 나의 작물은 여전히 힘없이 쓰러져 있다. 이때쯤 되면 인정할 수밖에 없다. 도시농부로서 내 소양이 많이 부족하여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모종이 약한 것도, 땅이 모질어서도 아닌 내 탓을 하는 자아 성찰 시간이 시작된다.
자아 성찰은 시작되지만,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하나도 모르면 어떤 질문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알 수 없다는 학창시절 평범한 진리가 도시농부가 된 지금에도 여전히 마음속을 파고든다. 깜깜하고 답답한 마음을 안고 우두커니 텃밭에 서 있는데 마침 마을 선배를 만났다. 내 마음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던 것인지 별다른 말씀 없이 모종삽을 가지고 와서 시든 작물을 걷어내기 시작한다.
‘그래도 아직 포기할 때는 아닌 것 같은데….’
마을 선배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나는, 속마음으로만 아직은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해본다. 무얼 하시려는 것인지 묻는 내 질문에, 일단 모종삽 하나 가지고 와서 옆에서 잘 보고 따라하라신다. 시든 잎만큼이나 앙상한 뿌리를 드러내면서 뽑힌 작물이 텃밭 고랑 사이에 쓰러진다. 작물을 걷어낸 텃밭은 여름 폭우에 부스러진 터 마냥 심란한 속내를 드러내고만다. 봄 농사를 망쳤다는 아쉬운 마음으로 다른 텃밭에서 싱싱하게 자라는 작물을 보며 나의 부족함에 마음이 움츠러든다. 가련하게 쓰러져 있는 작물처럼 내 마음도 힘없이 희망의 등불이 약하게 깜빡이는 기분이 든다. 좋은 농부 손에 놓였다면 힘차게 뿌리 내리고 있을 작물에 가장 미안한 마음이다.
“자, 이제부터 다시 심는 겁니다.”
선배 농부의 한마디 말에 어리둥절하다. 금방 뽑아낸 줄기마저 시들해져서 이제는 잎사귀에서 생명력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그 작물을 다시 심으라는 말인지 되물었지만, 다시 심는 것이라는 말에 반신반의하는 마음이다. 선배 농부의 텃밭에서 잘 자라고 있는 작물을 증거 삼아 그 말을 따라서, 시들어 뽑아 놓은 작물을 다시 텃밭에 심기 위해 우선은 텃밭을 깔끔하게 정리를 시작한다. 흔히 쟁기 또는 쇠스랑이라고 말하는 농기구 ‘네기’로 어질러진 밭을 다듬기 시작한다. 쇠스랑이 밭을 오갈 때마다 엄지손가락 마디보다 굵은 돌이 한 움큼씩 골라져 나온다. 모종 심기 전에 한 번 정리했는데도, 꼼꼼하게 들여다보지 못한 나의 지난 행적이, 쇠스랑 오갈 때마다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아 마음이 부끄럽다. 그러는 사이 나의 돌밭은 모두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이 정도면 돌을 심어 놓은 것이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까지 들려올 때 나도 같이 호탕한 듯 웃었지만, 속마음으로는 숨을 곳을 찾기 바빴다. 그렇게 정리가 끝난 텃밭에 다시 한번 작물을 정성스럽게 심기 시작한다. 흙을 높게 돋아주고 심으라는 선배의 말 그대로 실천하면서.
다시 심기는 모두 마쳤지만, 뿌듯한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그렇지 않아도 이제 곧 세상 떠날 듯이 처져 있던 작물을 뽑아서 던져 놓고 흙을 고르는 두어 시간 동안 그대로 땅 위에 뉘어 놓았던 작물이 온전한 모양새일 리 없다. 다시 심기 전보다 더 처져 있는 모습에서 시간 낭비한 것은 아닌가 하는 후회마저 느껴진다. 그래도 농부로서 포기하기보다는 최선을 다해보자는 생각에 선배 말 따라 마지막 남은 한 포기까지 버리지 못하고 다시 심어 본다. 혹시나 기적처럼 일어서려나 하는 마음에 텃밭 앞에서 작물을 한참 바라보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눈 빠지게 지켜본다고 무슨 수가 나겠냐며 시간에 의지해보라는 말씀을 선배 농부가 하신다. 말 잘 듣는 나는 또 그 말씀 따라서 그날은 그렇게 내려왔다.
다음날은 해 뜨기 전에 눈부터 떠졌다. 밤사이 날은 더 따뜻해졌지만, 시든 작물은 어둠이 드리운 시간마저 힘겹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되었다. 이제 겨우 새벽 어슴푸레한 빛이 퍼지는 동안 밭으로 가는 계단 길을 오르면서 조금은 설레고 한편으로는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호흡을 가다듬어본다. 하루 만에 당장 나아지지는 않았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지켜보자고 자신을 타이르면서.
텃밭에 오르고 잠시 동안 내 밭을 찾지 못했다. 눈으로 보이는 모습이 아닌 마음속에 담겨 있던 시든 작물이 가득했던 어제의 밭을 찾았지만,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 ‘분명 이쯤이었는데….’ 어림잡아 밭의 위치를 발걸음으로 세어보고 또 세어보면서 그제야 내 마음속에서는 이미 세상 떠난 것으로 생각한 어제 그 작물이, 한 포기 한 포기 싱싱하게 줄기와 잎을 꼿꼿이 세우고 있음이 눈에 들어온다. 이날 나는 봄기운이라는 흔한 말의 의미를 새롭게 받아들였다.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가 새봄에 다시 힘차게 일어서는 기적을 작은 텃밭에서 배울 수 있었다.
자연은 가혹하다. 조건이 맞지 않으면 정성과 관심만으로는 아무런 응답을 주지 않는다. 도시농부의 가련한 마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연이 만들어 놓은 순리와 기준을 따르지 않으면 단칼에 절망스러운 시련을 안겨준다. 한편으로 자연은 자애롭다. 설령 조금 부족하여도, 미숙함으로 실수를 해도 다시 기회를 준다. 나는 이날 마을 선배 도움으로 자연으로부터 두 번째 기회를 얻었다. 이 경험에서 세상 사는 진리도 이와 같음을 미루어 짐작하며, 지금 내 실수와 시행착오로 시드는 순간이 와도 다시 일어설 수 있으리라는 소박한 꿈을 가져본다. 실수해도, 실패해도, 잘못되어도, 다시 꿈꿀 수 있다는 희망이 나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꿈이 되어 주었다.
4월, 이제 다시 새로운 꿈을 싱그럽게 피워 볼 시간이다. 어려운 순간을 이겨낸 뒤에 가장 아름다운 꿈을 찾을 수 있다는 설레는 마음으로 이 봄을 서둘러서 살짝 열어본다. 아름답다, 새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