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게도 도시 생활하면서 농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기회를 얻었다. 농부가 되기 전 봄이라는 시간은 긴 겨울 지난 꽃 피는 계절,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겉옷을 벗어내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보송보송한 길을 산책할 수 있는 고마운 계절이었다. 생각해보면 겨울과 봄은 참 극단적이고 강렬한 변화다. 모든 생명이 움츠러들고 자취를 감춘 얼어붙은 대지가 영원할 것처럼 보이다가도, 어딘가에서 새싹 하나 움트기 시작하면 어느새 온 땅이 형형색색으로 가득해지니 말이다.
도시 농부의 눈으로 봄을 관찰하다 보면 놀라운 일 가득한 계절이 봄이다. 도시 농부 생활 이전에는 흔히 먹는 시금치, 상추, 청경채 씨앗을 본 일이 없었는데, 처음 씨앗을 받아들고는 씨앗의 크기가 너무 작아서 놀란 기억이 있다. 농사 첫해에는 과연 모래알 같은 씨앗이 그동안 마트에서 만났던 청경채가 되는 것이 사실일까 의문 가득했다. 처음 며칠은 씨앗 뿌려진 땅에 아무런 소식도 보이지 않아서 매일 아침 출근 전에 땅을 살피며 역시 안되나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초보 농부의 기우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봄비 가득 내린 어느 날 어제까지 비어 있던 땅은 녹색 푸르름으로 가득하였다.
모래알 같은 씨앗에서 새싹이 자라 푸른 땅을 만드는 경외감에 취하는 것도 잠시뿐인데, 이제부터는 시시각각 사람들에 의해서 해충이라 불리는 곤충과의 신경전이 펼쳐진다. 잠시만 한눈팔면 마음 가득 기다렸던 봄 작물을 아삭거리며 해치우고 있는 해충과 만나게 된다. 경험 많은 농부는 해충과의 전쟁을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대비해두지만, 모든 것이 처음인 나는 머리가 아닌 몸을 써서 해충을 퇴치하곤 했다. 어느 해 가을엔가는 톡톡이라는 해충을 나무젓가락 하나 의지해서 온종일 잡곤 했으니 무지함도 이 정도면 명품이 아니었을까 싶다.
농사하다 보면 어떤 작물은 정말 혼자서 쑥쑥 잘 자란다. 양분만 충분하다면 초보 농부라도 제법 먹을만한 수확의 기쁨을 가져다준다. 아쉽게도 그렇지 못한 경우가 훨씬 더 많은데, 경험이 쌓이고 나중에야 알았지만 잘 자라지 못하는 작물에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는데 대부분은 심고 가꾸는 농부의 부족함 때문이다. 어느 해인가 가지 농사를 지었는데 도시에서 가지는 모종을 이용하게 된다. 씨앗으로 심어 가꾸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보니 따뜻한 온실 육묘장에서 키운 모종을 봄에 심는 것이다. 잎이 다칠까 하여 모종을 얕게 심었더니 다음날 모종이 모두 땅에 드러누워 있었다. 초보 농부였던 나는 쓰러진 모종은 모두 생명이 끝난 것인가 하여 망연자실했다.
그런 나를 지켜보던 한 분이 도와주겠다고 팔을 걷었다. 그리고는 쓰러진 모종 하나하나를 땅에서 다시 뽑아 올려 흙을 돋우고 다시 깊이 심어주었다. 너무 힘없이 쓰러져서 혼자 힘으로 더는 서 있지 못하게 된 모종은 지지대에 묶어 세워주었다. 이 모든 과정이 손이 많이 가는 일이기도 했지만,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모종이 과연 다시 자기 자리를 잡아갈 수 있을까 의문이 들기도 했다. 이때 분명하게 배운 사실이 있는데,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살기 위한 길을 찾아낸다는 것이었다. 아주 천천히, 쓰러졌던 모종은 모두 훌륭하게 봄기운에 일어났고, 여름 동안 아름답게 빛났다.
가지를 수확할 때가 되었을 때 나의 가지밭은 그 누구의 밭보다도 크고 아름다운 수확으로 가득했다. 처음엔 쓰러졌던 모종에서 수확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의문도 들었지만, 봄 동안 다시 일어서는 생명이 감사해서 다른 누구보다 진심으로 애정을 가지고 정성으로 대했던 것에 응답을 해주는 것이 감사했다.
농사에서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성장을 응원하며, 지지대를 세워주는 경험은 사회생활까지 이어졌는데, 새로운 일터에 들어가면서 처음부터 생각했던 것이 누군가에게 응원이 되고, 지지대 역할을 해줄 수 있기를 소망했다. 30대의 내가 혼자만의 성공과 성취를 위해서 뒤돌아보지 않고 달렸다면, 지금의 나는 많이 달라졌다.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지만, 나의 여름은 지나가고 있다. 나의 가을 동안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를 오랫동안 반문한 뒤 누군가의 지지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진심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도시 농부 생활의 경험이 나에게는 축복과 같은 혜안이 되어주었다.
사회생활이라는 것은 개인적으로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상처받고 시무룩해졌다 다시 애써 힘을 내기를 반복하는 과정이었다. 마음 단단한 사람은 사뭇 다른 인생을 살아갈 것이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애써 살아가는 과정을 반복했다. 이렇게 생각해보니 쓰러져 누워버린 가지를 왜 그렇게까지 애써 살리고 가꾸려 했는지 이해도 된다. 그 모습이 나와 같았기 때문이다. 무너졌을 때 누군가 손 잡아주기를 절실하게 희망했기에 지쳐 쓰러져 있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은 일하는 곳으로 이어지고 있다. 나 혼자의 성공을 목적에 두지 않다 보니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무엇보다 지치고 상처받은 마음을 보면서 할 수 있다면 작은 지지대가, 조용한 응원이 되어줄 수 있기를 바라게 되었다.
참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점은 나라는 사람은 평생 경솔했고 쉽게 상처받았으며, 중요한 때에 나태하기 일쑤였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지나치게 빈틈 많았던 사람이기에 반복하는 실수를 만회하면서 얻은 경험에서 소중하게 쌓여 온 것이 있다. 그것은 잘못된 나를 만날 때마다 스스로 자책하기보다 이해하고 용서하고 잘못된 과정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용기 내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배웠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지지대가 되어주기 위한 마법의 문장도 지금의 일터에서 배워가고 있는데, 내가 가장 아끼는 문장은 ‘무슨 일이든 필요한 일이 있으면 편하실 때 말씀해주세요’라는 것이다. 진심을 담아서 이 문장을 전하면 정말 혼자 고심하여 해결하기 어려운 일을 전해오는 경우가 있는데, 그 모든 일을 해결해줄 능력이 나에게는 없지만, 단지 어려움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다.
어느 날 봄이라는 계절을 살아가는 동료가 나에게 질문했다. ‘고통은 나누면 반이 되고, 행복은 나누면 배가 된다는 말은 사실일까요?’라고.
그 질문의 답을 당시에는 나도 알기 어려웠는데, 우연한 기회에 어려운 마음을 나눌 기회가 있었고, 질문의 답은 질문해준 동료로부터 얻을 수 있었다. 지금의 나는 믿고 있는데, 고통의 기억과 흔적을 혼자만의 짐으로 안고 있기보다 나눌 때 훨씬 가벼워진다. 나눈다고 그 크기가 반이 될지는 모르지만, 동료의 말을 빌려보면 훨씬 가벼워진 듯 보였다. 그렇게 계속 나누다 보면 조금씩 더 가벼워지고 언젠가는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 잊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작아지지 않을까?
봄이라는 계절을 지금 살아가는 너에게 말하고 싶다. 너란 봄은 씨앗이고 새싹이다. 아마도 앞으로 찾아올 긴 여름 동안 생명 가득 담은 너란 봄은 새로운 누군가의 봄을 응원하는 가을이 되어주겠지. 그런 너의 봄을 응원한다. 그리고 소망한다. 나란 가을이 너의 봄이 여름을 준비하는 동안 잠깐의 휴식이 될 수 있기를. 너란 봄이 맞이할 여름이 찬란하고 아름답기를, 행복한 계절이 되기를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