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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려 깊은 사람의 향기

어쩌다 보니 일터에서 업무상 협력이 필요한 외부 기관과 소통하는 일을 하고 있다. 스타트업이라 부르는 작은 조직에서 일하다 보니 소통하는 곳이 다양한 편이다. 회사의 인사와 노무 업무를 위한 노무법인부터, 세무법인, 특허 관리를 위한 특허업무 기관, 사업 부서별로 협업하고 있는 협력 업체까지 대충 그 숫자를 세어보니 서른 곳 이상 된다. 그렇다 보니 가끔은 연락 오는 곳이 누구인지를 기억하지 못하여 난감할 때가 있다. 몇 번 그런 상황을 경험한 뒤로 연락처를 저장할 때 나만의 습관이 생겼는데, 전화가 오면 표시되는 이름에 그 사람의 회사, 직함, 어떤 이유로 연락을 나누었는지 핵심단어를 함께 적어두고 전화가 오면 기억을 더듬곤 한다. 오늘 글은 ‘사려 깊은 G'에 관한 것이다.

회사를 대신하는 소통역할은 언제나 쉽지 않은데, 나의 실수와 내 일하는 수준이 회사의 가치를 보여주기에 조심스러움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조심스러운 대화 상대로는 투자자가 있다. 스타트업이라는 작은 회사는 사업이 정상적인 단계에 들어설 때까지 준비하는 시간 동안 자금이 필요하다. 나는 이것을 사회적 돌봄이라고 표현한다. 좋은 기획과 시장성이 있어도 시장에 진출하는 동안 생존하기 위한 힘이 필요한데,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 투자를 유치하는 것이다. 그래서 투자자와 대화에는 평소보다 훨씬 엄격한 주의를 기울이려 노력하고 있다. 한 번의 실수가 회사의 가치가 되고 그 가치 판단이 투자의 결과에 영향을 준다는 생각을 하면, 조심하려는 마음은 노력해서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자연스러운 반응에 가깝다.

대화와 소통에서 주의한다는 것은 한껏 나를 낮추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필요한 요구사항을 적절한 언어로 정확히 전달하고, 요구받는 것 중에서 실천 가능한 것을 명료하게 표현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상대 입장에서 듣기 편한 수준을 잘 찾아내야 하는데, 이것이 어떤 명확한 공식이 있다기보다는 상대에 따라 상황의 성격을 살피고 적정한 지점을 찾아내야 한다. 이것은 어찌 보면 상식과 침착함을 더한 감각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이 몇 년간 이 일을 해온 입장에서 드는 생각이다. 물론 이런 일을 호흡하듯이, 스며들듯이 자연스럽게 해내는 수완 좋은 전문가도 많이 있지만 나는 아쉽게도 그런 축에 속하지 못한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그런 축에 속하지 않으려고 무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태생적인 부족함이 있어도 회사의 대리인으로 역할에는 충실하기 위해서 애는 쓴다. 그렇게 애써서 소통한 뒤에 그 과정을 되감아 보면, 나의 언어는 차갑고 견고하고 높은 담벼락 같아 보인다. 여름 초입의 따뜻함, 봄 아지랑이의 어지러움, 가을빛 노을의 눈부심을 사랑하는 나에게 내가 쏟아놓은 차갑고 단단하고 매끈거리는 언어는 스스로에게 여전히 참 낯설고 싫다. 그렇지만 몇 번의 경험으로 허술하고 틈 많은 언어가 투자자에게 전해지면 금방 다시 돌아올 칼날 위에 서서 걸어야 할 것을 알기에, 낯설고 서투른 언어를 마치 내 것인 양 오늘도 적어 나간다.

얼마 전에는 새로운 기관과 투자에 관해 풀어가야 하는 일이 있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이번에도 새로운 담벼락을 세워야 하리라 예상하였지만, 투자기관 담당자 G와의 대화는 시작부터 조금 달랐다. 사실 몇 번의 경험에서 기억하고 있는 투자 유치 업무 과정은, 우선 벼랑 아래로 내던져진 뒤에 다시 그 벼랑을 기어 올라가야 하는 과정이다. 그렇게 살아남은 튼튼한 몇몇이 벼랑 위 놓여 있는 길을 상처 입은 몸으로 달려서 완주해내야 한다. 기회는 공정하지만 살아남는 것은 각자의 몫이고, 포기하는 것도 각자의 선택이다. 이 과정에서 벼랑을 어떻게 오르고 있는지에 관심 두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렇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G와의 대화는 처음부터 달랐다.

G는 투자 참여를 위한 과정을 설명해주었는데, 그 문장 속에는 그동안 투자를 위해 나눈 대화에서는 느껴볼 수 없는 감사한 배려가 있었다. 처음 해보는 과정이라 내심 걱정하고 있는 사이에 ‘어려움이 있으면 언제든 상담할 테니 편히 알려달라는 표현’이 진솔한 언어로 전해졌다. 그 문장은 길지 않았지만 마치, 따뜻한 차 한잔 내릴 때 방안 가득 채우는 신선한 향기처럼 온종일 마음속을 가득 채우며 감돌았다.

투자 유치하는 과정을 걸어갈 때 되도록 진실을 진심으로 전하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진실은 쉽게 전해지지만, 진심까지는 상대에게 닿지 않는 때가 많다. 미심쩍은 진실을 검증하기 위한 질문은 쏟아지지만, 진심을 확인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몇 번 그런 일을 경험한 뒤로는 나 역시 진실만 건조한 그릇에 담아 전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는데, G에게는 다시 한번 힘을 내서 진심을 전하려 했다. 그렇지만 회신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생각하지 못한 회신을 받았다. 그 회신에는 전하고 싶은 진심을 들여다본 이의 격려와 배려가 담겨 있었다. 이 일을 하면서 숨 쉴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G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한동안 G의 문장에 스며있는 느낌이 무엇인지를 표현할 단어를 찾았는데, 상념에 빠져 북촌 길을 걷던 중에 ‘사려 깊은 이가 있는 곳’이라는 포스터를 보게 되었고,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G가 문장 속에 담아낸 사람 사는 힘을 더해준 그것이 사려 깊음이라는 것을 말이다. 투자 심사를 위한 공식적인 일정에 참여하면서 G를 직접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비록 짧은 대화를 나눈 것뿐이었지만, G의 사려 깊음이 억지로 꾸미거나 포장한 것이 아니라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봄바람 훈풍에 담긴 따듯함이나, 가을 해바라기를 비추어주는 햇살처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지난 삶을 되돌아보면 잠시 마주쳐도 되돌아보게 되고, 다시 생각하게 되는 이들이 몇 있는데, 나에겐 G가 그런 사람이다. 

사려 깊은 사람의 언어에는 아름다운 향기가 가득하다. 그 향기는 차가워진 마음을 데우고 시든 잎새에 생명의 기운을 다시 가져다준다. 그리고 나에게는 다시 시작할 수 있으리라는 용기를 심어 주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상황에서 사려 깊은 향기를 기억하며 호흡을 가다듬다 보면 절망적인 일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작아져 있다. 사려 깊은 이의 향기에는 시간을 초월하는 힘이 있다. 언제라도 그 배려를 기억해낼 수만 있다면 용기를 다시 얻을 수 있으니 말이다. 가능할지 모르지만 나도 G처럼 사려 깊은 향기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군가에게 살아갈 용기의 증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참 신비롭고 경이로운 일이기에. 여름 바닷가 청량하게 부서지는 파도처럼 일렁이며 누군가에게 위안이 되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 🍀

📩 이 글을 SBA 감선생님께 드립니다.